비 맞는 여인숙외 다수
비 맞는 여인숙
그대 없는 별에서 오늘도
숙박계를 쓰고
지나친 추억과 일박한다
이번 세상은 너무 가혹해!
티끌 속을 날아다니는 것도 힘들군!
그 옛날 토벌대를 피해
개마고원을 타박타박 넘는 것만큼이나
더 이상 쫓기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부양할 가족도 없는데,
나는 왜 자꾸만 속초 앞바다가 그리운가
이 비 맞는 여인숙에서
밤이면 독감처럼 파고드는......,
엽서만한 그리움
아직도 추억의 뒷골목을 윤회하는
지구의 악몽
그 옛날 강원도에서의 내 꿈은 우편배달부였던가
그대 집 앞에 걸려 있던 낡은 우편함
끝내 편지 한 장 전하지 못하고
이렇게 나 ㅡ , 느티나무처럼 늙어서
흐릿한 눈 속을 뒤덮는
커다란 적막,
이 쓸쓸한 유배지에서
다 끝난 망명정부처럼 나는 웃고 있네.
한계령
44번 국도의 바람은 44번 국도를 지나간다
간간 빗방울이 뿌려서
추억을 닦는 와이퍼 너머로 후두둑, 단풍이 진다
여긴 한계령이고, 바다가 지척이다
벌써 겨울이군요
오래전 낙산에서 만난 11월의 바다는 이미 시들어버렸
습니다.
또박 또박 말하지 않아도 내 입술은 벌써 춥다
창밖의 옷 벗은 나무들보다 옷 입은 내가 더 춥다
길은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다는 듯
44번 국도의 이정표는 느릿느릿 나를 끌고 입산한다
이쯤에서 내 늦은 기억도
당신을 찾지 못하고 길 잃을 것이다
어쩌면 다름 생에도 나는 44번 국도를 따라가고 있으
리라
이제껏 열렬하게 인생을 낭비했으니,
내게 남은 날들은 자작나무 껍질처럼 얇고, 만지면 부
서진다
벌서 저녁이군요
단지 나는 한계령을 넘어와
낙산으로 가는 내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적막한 숲에서는 통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저 무상한 나무들의 세상---,
오늘은 이만 입 다물고 오색에서 1박합니다
단풍 지는 여인숙에서
시동을 끄듯 나는 내 몸의 헐거워진 플러그를 뽑는다
앙상한 뼈들이 철커덕, 스프링 침대에 쓰러진다
내 옆에 모로 누워 밤새 뒤척이던---,
11월의 바다
이따금 빗방울이 들이치고
그때마다 단풍 지던 하룻밤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이
다.
가지 못한 구름
창문을 반쯤 열어젖힌 내 삶에
우기가 닥친다
나는 온전히 하늘을 읽을 수가
없었다 빗방울이
내 발등을 두들긴다 후두둑 후둑
두두다다두다닥 우다다다다다 투다닥
가지 못한 구름이---,
가지 않고 내 삶을 기웃거렸다.
고장난 것들
아침에 나간 추억이 돌아오지 않는다
70년대 라디오 잡음처럼 비가 내리는 밤,
버려진 남자의 폐허 위로
몇 그루의 나무가 시간을 펄럭이며 서 있다
내가 키운 나무들은 아무래도 그리움이 지나쳤다
조금만 비가 와도 와락 눈물에 젖는다
창밖에는 이미 캄캄한 공기가 모든 길을 삼켜버렸다
너무 오래 나는 뒤엉킨 길을 헤매고 있다
비가 그친 뒤에도 내 몸 밖에선
치지직거리는 잡음이 계속된다
어린 시절으 '그'가 마루에 앉아
저녁내 비가 그치지 않는 라디오를 탁탁 두들기다가
누런 공책 뒷장을 뜯어 '고장'이라고 쓴다
고장난 것들,
집 나간 추억을 기다리다 나는 또 지친다.
민박합니다
한 사흘 폭풍 닥쳐 섬에 남겨진 민박 손님처럼
살다 보면 종종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자주 그런 민박 손님 신세가 되다 보면,
배 끊기기 전에 미리 섬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쯤 알
게 되는 법이지요
그럼에도 때로는 부러 섬에 남아 민박 손님이 되고 싶
을 때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요,
문제는 언제나 그 민박집 주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겁니다
하긴 그런 경우 주인보다는 손님으로 남는 편이 더 나
은 법이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섬에서 태풍을 만났을 때 일입니다만,
언제까지나 인생을 손님처럼 민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
겠지요
엄연히 인생과 민박집은 다른 것일 테지만,
살다 보면 종종 어쩔 수 없이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있
습니다
손님이 없어도 거기서 그냥 민박하는 민박집 주인처럼
말입니다.
후두둑, 그대
그대는 뿌옇고 아주 흘러간다
'너무'와 '먼'을 지나친 낡아빠진 길에서
나 이렇게 앉아, 다 젖은
구름을 적어본다
정말 축축한 입술이군!
아무렇지 않게 곡필해온 내 병의 뿌리는
이미 집 앞을 지나쳤으니,
뒤늦게 사랑이란
'별 수 없는'과 '가버린'을 용납하는 저열한
믿음에 지나지 않고,
행간이 얼룩진 그곳에서
나 공무도하-- 하면서
그대, 후두둑 지는
차마 넘기지 못한 숲으로
그렁그렁 흘러갑니다.
우중야독
명백하게 지금은 비가 온다
사랑하지도 않은 당신의 안부가 궁금할 것이고,
한동안 축축할 것이다 나는
무관하게 머리를 빗고,
'그건 불가능합니다'라는 미래에 대해 독서한다
파본이 된 나의 39페이지는
청계천 고서점이 문 닫은 뒤로 찾을 수 없다
언제나 당신의 핵심은 짓밟힌 결론을 말한다
가령, 이렇게 끝나서 다행이야
라거나 당신은 너무 구겨져 있군, 이라고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를 들여앉힌 시간은 납작하고 기울어서
당신을 엿보는 내가 기우뚱하다는 거고
휘청이는 저녁을 멈출 수 없다는 거다
어떤 밤은 흉터처럼 자란 정체불명의 그림자를
힘껏 물리칠 테지만,
여기는 분명한 12시 45분이고 비가 온다.
우체통
자고 나면 생이
슬퍼진다
쓸데없는 편지를 부치고
우체통처럼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세월은
우편배달부처럼 지나간다.
정암사 열목어
정암사에는 아직도 자장이 산다
그거도 정암사 계곡을 이리저리 헤엄치며 산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정암사 계곡에 가보라
거기서 윤회한 자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만일 계곡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열목어를 만났다면,
당신은 이미 자장을 본 것이다
이 사실을 정암사 스님들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적멸보궁 가다가 혹은 수마노탑 가다가
똑 한 번은 계곡을 들여다본다
스님 거기 잘 계시요?
그때마다 스님은 잘 있다고 지느러미를 흔든다
~앞남산 황국 단풍은 구시월에나 들구요
이내 몸에 속단풍은 시시때때로 드네~
불경 대신 중얼중얼 정선아리랑 부르며,
죽어도 죽은 목어는 싫다고
오늘도 정암사 열목어로 산다
통리행
8월호 월간지 부록 같은, 산중입니다
저녁에 떠난 슬픔은 느닷없이
던져진 기억을 기웃거립니다
언제나 나는 당신의 나쁜 놈,
당신의 적막함이었죠
페이지마다 총총 그늘진 발자국뿐입니다
추억의 행간을 건너온---,
빨래 거품 같은 구름의 날들
끝내 기록할 수 없었던 딱딱한 서른 살의 강물
집 나간 그리움은 단풍나무 숲에서 5분간 정차합니다
짐짝 같은 영혼이 육체를 밀고
몸 밖의 낡고 헐거운 풍경을 건너
이쯤에서 이제 지나간 당신을 폐차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세상에선 내가 너무 늦었으니,
늦은 것에 대해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기다리는 것이지만,
기다림 다한 길들은 여기서 다 저뭅니다.
이상한 밥상
어느 날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1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밥상을 차리고 계신다 10년 전보다 20년은 더 젊어진 어머니는 콩나물 무치던 손으로 이제는 늙어버린 내 손을 밥상 앞으로 잡아끈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밖에서 또 놀다 온 거냐? 젊은 어머니의 잔소리를 참아내며 늙은 내가 밥을 먹는다 어머닌 참,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아세요? 그럴 때마다 이놈 자식이, 어머니의 싱싱한 손이 낡은 내 엉덩이를 후려친다 너는 커서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냐? 어머니, 난 이미 어머니만큼 살았고, 인생의 절반을 시인으로 살았으면 됐지, 뭐가 또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이놈이, 밥 흘리지 말랬더니, 그거 다 저승 가서 먹어야 해! 어느 날부턴가 다 낡은 나에게 싱싱한 어머니는 죽지도 않는다.
안녕, 후두둑 씨
후두둑 씨에게 늦은 소포가 온다
나는 잘 있다고 포장된 외로운 책이다
갈피마다 부엌에서 침대까지 걸어간
발자국이 적혀 있다
후두둑 씨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외투를 걸치고 식탁에 앉는다
지난봄에 들여놓은 아들 녀석이 잠깐
불가사의한 안녕을 묻는다
낡은 커피라도 드릴까요?
후두둑 씨에게 인생은 앉아 있는 것이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가
매일같이 삐걱이는 후두둑 씨를 기다린다
사뿐히- 갈라진 여백을 중얼거리며
아들아 거의 다 왔다,
문이 닫힌 아내가
지붕 위에서 성큼성큼 쏟아져 내린다.
12월의 곰사냥
초목이 난립한 덤불숲은 달콤한 괴물로 가득하다
질척거리는 하늘에
나는 12월의 곰사냥이라고 썼다
그게 뭐냐고, 까마귀밥여름나무가 착한 마누라처럼 묻는다
이를테면 네가 들고 있는 붉은 과육 같은 거지
달팽이와 자동차가 지나간 정류장은 벌써 가랑 잎에 묻혀서
우글거리는 벌레들의 간이역이 되었다
웅덩이마다 끈적하고 비린 시간이 고여 있었고,
내가 먹어치운 빵부스러기 같은 길의 자취가
어느새 배고픈 골짜기를 일으켰다
나는 킁킁거렸고 으르렁거렸으며 헐떡이고 미끄러졌다
멀리서 사냥꾼 짖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고,
온몸에서 충동과 야만이 돋았다
이제 12월의 곰사냥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늑대 새끼를
차도에 몸 던진 취객으로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보니,
정작 핸들을 잡고 있지 않다는 황망한 사실을
나는 신갈나무 숲에 묻어야 했다
사실 난 용감하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길줄도 모른다
내가 문 열고 나온 골목은 언제나 인색한 추억이 난무했다
어린 시절 도깨비를 몽둥이로 쳐버린 순진한 악마성은
풍경의 연민에 불탄 배처럼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여기가 심연의 고래 뱃속일지라도
어느 날 고래 한 마리가 이 숲의 나무를 다 먹어치우고
바닷속으로 영영 사라진다해도
12월의 곰사냥은 기어코 숨찬 협곡을 건널 것이고,
기꺼이 계곡이 다한 자궁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섭씨 5도의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혹은 가지 칠 수 없는 관습이
숲에는 가득하고,
진부한 출근의 방식으로는 이 울창한 시간을 기록할 수 없다
차라리 나는 가볍게 안녕, 하는 것처럼
12월의 곰사냥, 이라고 말해야하는 것이다
꽃과 저녁과 잎과 입이 얽히고 설킨 여기서 이제
막 변신을 시작한 반인반수의 꼬리를 힘껏 흔들며
-. 12 월 의 곰 사 냥 이 라 고.
시집 ‘안녕, 후두둑 씨’(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