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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풍경의 소묘(素描)외4

이양덕 2008. 7. 1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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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소묘(素描) /이만섭

 

                      

  

한 하고 포근한 젖빛 하늘 

일광이 풍경을 흔연스레 비추는데

산이 강에 내려와 물을 베고 누워 있다

 

저렇듯 한가로운 날은 산도 

물 곁에서 한 숨결 내리고 싶은 것일까,

거대한 몸집은 필시

일순간에 첨벙 하고 들여놓았을 터인데 

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표정은 숨죽인 듯 명징하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올까,

물의 촉수들이 일제히 수런거리자

산이 재빠르게 물속을 빠져나간다

 

어느 쓸쓸한 저녁, 달이 

강 가운데서 은밀히 노닐던 그 밤에도

물의 촉수들이 바람결에 수런거리자

달은 황급히 하늘로 돌아갔다

 

그때도 나는 깨달았다

고요는 풍경을 소묘하지만

중심을 잃으면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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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朴淵瀑)*을 베끼다 /이만섭

 

 

 

직하하는 물기둥은 전신이 비백(飛白)이다

 

어느 창공을 날다가 내려오는 천마의 흰 날개인가,

 

도끼로 빠갠 듯이 장엄하게 그어댄 붓질은

 

붓이 가지 않은 자리가 박연폭이라,

 

송도삼절에 두 인걸은 가고 홀로 남아

 

만고의 세월로 주야에 긋지 않으매

 

절륜한 사랑 찾아 쏟아지는 저 폭포,

 

범사정(泛斯亭) 곁을 소요하는 두 처사

 

동자를 뒤꼍에 두고 용소를 가리키는데

 

고매담(姑梅潭) 아래 자취 감춘 박(朴)선비를 찾는가,

 

넋 나간 듯 우러러보니 우레와 같은 물소리

 

귓전이 먹먹하다, 유성동(流聲洞)이 따로 없다,

 

 

*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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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시(詩) /이만섭

 

 

이 시대의 어른들은 

반성은 없고 호통만 친다

언제까지 나무람만 일삼을 것인가

말소리 들어보면 영판 구성 없고

심술에서 나오듯 볼멘 소리 허다하다

일조량 짧은 꽃 숭어리째 진다는데

저렇듯 팽개치듯 돌아서는

소갈머리 없는 말 말 말

이 시대 어른의 시는 어디에 있는가

어른이라서 어른일 것인가

새로운 것이 없으면 낡은 것이다

낮술에 취한 하루해는 더 짧고

낡은 것은 새로움을 방해한다

우리 시대의 어른들은 

오늘도 반성은 없고 호통만 친다

여전히 지루한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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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추억 /이만섭

 

 

꽃이란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고향집 담장 가에 핀 살구꽃 만할까,

아침 햇살 머금은 이슬로 다가온 

열 일곱 그 봄, 그 꽃,

가만히 고개 내밀다가 들킨 눈빛

발그레이 수줍던 볼 아직도 설레인다

그날에 뛰기 시작한 가슴

봄이 다 가도록 쿵쿵거렸다

어느 봄밤, 살구나무 아래로 가서

까치발 올려 그리움을 키워놓고도

봄날이 어떻게 떠났는지 아련.혼미하다

그 해 칠월 어느 아침,

동네 우물가를 다녀온 어머니는

마을 안통에 쉬쉬 하는 소문이라며

살구나무집 손녀가 아까운 나이에 갔다는 말에

그만 내 가슴 철렁 내려앉고

그 봄날에 핀 살구꽃 그제서야 투욱,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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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물로 걸어오듯* /이만섭

 

 

사랑은 그리움이 현신(現身)한 것,

 

달이 물로 걸어오듯

그대 어둠을 밝히고 온다

 

한 순간 해일처럼 덥쳐온 유혹

감당할 수 없어

마침내 푸른 밤의 수명성에 갇히고

 

아, 달빛 젖은 밤은

달빛 젖은 밤은 아무도 모르리

 

너와 나 사이를 하얗게 물들이고

물 위를 걸어오는 달이여, 

 

 

*고연옥 작, 임영웅 연출의 연극 

 

 

  

Richard Abel - Serenade De Toselli (토셀리의 소야곡)

 

 

 

 

출처 : 카프카 /이만섭
글쓴이 : 카프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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