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풍경의 소묘(素描)외4
풍경의 소묘(素描) /이만섭
한 하고 포근한 젖빛 하늘
일광이 풍경을 흔연스레 비추는데
산이 강에 내려와 물을 베고 누워 있다
저렇듯 한가로운 날은 산도
물 곁에서 한 숨결 내리고 싶은 것일까,
거대한 몸집은 필시
일순간에 첨벙 하고 들여놓았을 터인데
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표정은 숨죽인 듯 명징하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올까,
물의 촉수들이 일제히 수런거리자
산이 재빠르게 물속을 빠져나간다
어느 쓸쓸한 저녁, 달이
강 가운데서 은밀히 노닐던 그 밤에도
물의 촉수들이 바람결에 수런거리자
달은 황급히 하늘로 돌아갔다
그때도 나는 깨달았다
고요는 풍경을 소묘하지만
중심을 잃으면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박연폭(朴淵瀑)*을 베끼다 /이만섭
직하하는 물기둥은 전신이 비백(飛白)이다
어느 창공을 날다가 내려오는 천마의 흰 날개인가,
도끼로 빠갠 듯이 장엄하게 그어댄 붓질은
붓이 가지 않은 자리가 박연폭이라,
송도삼절에 두 인걸은 가고 홀로 남아
만고의 세월로 주야에 긋지 않으매
절륜한 사랑 찾아 쏟아지는 저 폭포,
범사정(泛斯亭) 곁을 소요하는 두 처사
동자를 뒤꼍에 두고 용소를 가리키는데
고매담(姑梅潭) 아래 자취 감춘 박(朴)선비를 찾는가,
넋 나간 듯 우러러보니 우레와 같은 물소리
귓전이 먹먹하다, 유성동(流聲洞)이 따로 없다,
*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지루한 시(詩) /이만섭
이 시대의 어른들은
반성은 없고 호통만 친다
언제까지 나무람만 일삼을 것인가
말소리 들어보면 영판 구성 없고
심술에서 나오듯 볼멘 소리 허다하다
일조량 짧은 꽃 숭어리째 진다는데
저렇듯 팽개치듯 돌아서는
소갈머리 없는 말 말 말
이 시대 어른의 시는 어디에 있는가
어른이라서 어른일 것인가
새로운 것이 없으면 낡은 것이다
낮술에 취한 하루해는 더 짧고
낡은 것은 새로움을 방해한다
우리 시대의 어른들은
오늘도 반성은 없고 호통만 친다
여전히 지루한 시를 쓴다
살구꽃 추억 /이만섭
꽃이란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고향집 담장 가에 핀 살구꽃 만할까,
아침 햇살 머금은 이슬로 다가온
열 일곱 그 봄, 그 꽃,
가만히 고개 내밀다가 들킨 눈빛
발그레이 수줍던 볼 아직도 설레인다
그날에 뛰기 시작한 가슴
봄이 다 가도록 쿵쿵거렸다
어느 봄밤, 살구나무 아래로 가서
까치발 올려 그리움을 키워놓고도
봄날이 어떻게 떠났는지 아련.혼미하다
그 해 칠월 어느 아침,
동네 우물가를 다녀온 어머니는
마을 안통에 쉬쉬 하는 소문이라며
살구나무집 손녀가 아까운 나이에 갔다는 말에
그만 내 가슴 철렁 내려앉고
그 봄날에 핀 살구꽃 그제서야 투욱,
지고..
달이 물로 걸어오듯* /이만섭
사랑은 그리움이 현신(現身)한 것,
달이 물로 걸어오듯
그대 어둠을 밝히고 온다
한 순간 해일처럼 덥쳐온 유혹
감당할 수 없어
마침내 푸른 밤의 수명성에 갇히고
아, 달빛 젖은 밤은
달빛 젖은 밤은 아무도 모르리
너와 나 사이를 하얗게 물들이고
물 위를 걸어오는 달이여,
*고연옥 작, 임영웅 연출의 연극
Richard Abel - Serenade De Toselli (토셀리의 소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