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당신의 목록(目錄)
당신의 목록(目錄) /이만섭
나의 노스텔지어는 이렇습니다
민음사 간 시집 <애너벨 . 리> 한 권,
그 19페이지에 담긴 당신의 미쁜 손길 위에
가만히 나의 손을 얹습니다
꽃 꽃 꽃잎이 흔들리듯 지금도 가슴이 떨리는군요
그때 당신은 도홧빛 얼굴로 다가왔고
나는 당신의 가슴 속 손거울을 살짝이 엿봅니다
거울은 반드시 사물의 정면을 비춰줍니다
그 무렵부터 초콜릿과 딤섬은 우리의 품목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신으로부터 작성한 첫 목록입니다
아, 깜빡 잊을 뻔했군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건기의 사이프러스를 적시던 베를렌느의 비를,
비는 는개처럼 우리 사이를 흩뿌렸지요
촉촉해진 사월의 사과나무는 꽃눈을 틔우고
푸른 계절을 흰나방처럼 꿈꾸던 나
저녁이 오면 창가에서 장미를 위한 연가를 부릅니다.
사랑은 목록을 만드는 거라고 말했나요
그런 저녁은 밑줄을 그어 당신의 목록을 적습니다
추가, 또 추가, 목록에 등재되던 수많은 언어들,
먼바다로 가는 푸른 기차는 언제쯤 오나요
당신과 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계절의 약속은 더욱 굳건해지고
기다림은 배낭처럼 꼬박꼬박 꾸려집니다
한 시절 가슴에 쓰여진 우리들의 시편들
당신, 이 여름 당신에 대한 나의 노스텔지어를 열고
나 이렇게 당신의 목록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