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같은 피 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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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피 /이만섭
바람도 소실해 간 한낮 제 무게조차 헐떡이는 햇빛 아래 낡은 손수레 한 대가 쇠똥구리처럼 데굴데굴 굴러 꽃집 문턱에 멎는다 훤히 이마부터 먼저 보이는 낮츰한 키는 당신의 등굽 같은 낙타고개를 넘어서 오리나 되는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우리자원의 김노인이시다 노인은 양계장에서 계분을 얻어다가 소일 삼아 만든 분갈이용 거름을 잔뜩 싣고 오셨다 종이박스 몇 점을 얻기 위해서다 땀으로 얼룩진 잔등에는 희뜩희뜩 소금꽃이 피었다 더 역동적인 것은 당신의 목줄기 사이로 툭툭 불거져 흐르는 꽃 같은 피다 그늘 속에 우두커니 피어있는 화원의 핏빛 없는 꽃들이 무색한 정오다
꽃은, / 이만섭
각시노랑나비 한 마리 환한 대낮을 등지고 숨소리조차 새근거리며
나는 뚫어지라 보는데
무릇 꽃 앞에서는 고백할 일이다
말을 붙이려 하다 /이만섭
지하철 1호선 종로 3가 역 환승하러 가는 주변이 어수선하다 좁은 공간에 난데없는 술렁임 삼삼오오 모여 노인들이 서성인다 초행인 듯한 한 사내가 곁을 지나가다가 좀 어수선한 광경인듯 싶은지 매점 주인에게 묻는다 "여기 무슨 일 났습니까?" "보면 모르오. 말 붙일라고들 안 그러요" 구겨진 신문지를 손에 들고 오가는 사람들을 틈새에서 굳은 표정들은 마냥 무료하다 누군가에게 말을 붙이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외로움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 붙일 수 없는 것이다 파시처럼 쓸쓸한 풍경이다
왼손에 대해 /이만섭
내 오른손이 그를 대할 때면 왼쪽에 그의 오른손이 있다 그에게는 오른손일 뿐인데 내게는 언제나 왼쪽에 있는 손이다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 오른손도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왼쪽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악수를 청한다거나 더는 구체적일 때 곁에서 돕는 왼손은 참 공손하다 이 공손하다는 말이나 흔히 말하는 두 손이란 말도 왼손도 오른손과 같다는 말일 것이다
꽃멀미
이만섭
봄녘의 꽃나무들이
꽃밥을 지어놓고
사방 가득히 꽃냄새를 풍긴다
미싯미싯 울렁거리는 현기증
맡을수록 허기지다
하늘도 진홍빛으로 물들어 놓고
애라도 밸 것 같다
돌멩이 같은 / 이만섭
언제 어디서나 빈틈없이 세월에 맞서는 것이 있다 닳고 해어져도 끝끝내 그대로 백 번인들 천 번인들 꽃이 피고 진들 해와 달을 함께 하며 모진 비바람과 풍상을 견디면서 다른 모든 것은 다 변해도 우둔함 그대로 인 것이 있다 슬픔이나 외로움 따위가 무엇이랴 이름 없는 자취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는 미욱함은
허름한 옛집 담장으로 쌓여 있거나 냇가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며 저리도 초연할 수 있을까
한 생애가 그럴 수만 있다면,
주전자 / 이만섭
물이 끓어오르자 뚜껑이 들썩인다 이때쯤이면 주전자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이다 피식피식 증기방울이 흘러 넘쳐 제 몸에서 녹아드는 소리는 제발 나좀 보라는 듯 성화에 가깝다 아내는 아까부터 알고 있다는 듯 잠자코 소가지를 참아준다 보리차도 한동안 끓어야 하는 거라며 그래야 물맛이 난다며 묵묵부답이다 부엌 쪽에서 흘러드는 보리차 냄새가 거실을 건너와 안방까지 흘러든다 그런 것을 매번 반복하며 주전자는 물맛을 익힌다 마침내 물꽃을 피워낸 꽃물을 쿨렁쿨렁 쏟아내는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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