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시인서재}

덕소가는 길 외 5편

이양덕 2009. 4. 9. 07:52

 

 

 

 

덕소 가는 길 /이만섭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 해도

강을 건너가는 길은 마음 설렌다

섬처럼 물이 가로놓인 저편 자적한

강 언덕을 바라보는 마음은 아련키만 하다

산벚나무들 내려와 강물에 옷자락을 적시며

봄 꿈에 젖어 있는 강 어부네

봉수아재는 민물고기 잡아놓고 기다리는데

내가 탄 버스는 더디 간다

차가 다리를 건널 때 

나릿나릿 이는 강바람은 꼭 배를 탄 기분이다

와부에 이르니 예봉의 뫼 뿌리가 확 잡아끈다

배꽃도 환한 춘궁으로 들어가는 길

문밖까지 마중나온 저녁연기 

꽃바람 부는 저녁은 이곳 강마을에서 

길을 잃어도 좋을 것만 같다 

 

 

 

 

 

 

 

4월의 바람 /이만섭

 

 

 

길 떠난 바람이 돌아왔다

흙먼지에 젖은 난분분한 옷자락

봄볕에 그을린 거무데데한 얼굴에도 마른버즘을 피웠다

아무렴 어떠랴,

이 땅에 꽃을 피우기 위해

저리도 동분서주하며 봄녘을 헤매지 않았던가,

봄 산의 능선을 넘고

산골짜기를 지나 강을 건너서

발바닥이 닳도록 이녘에 화신을 전하고

또다시 연두를 찾아 길을 나서고 있다

바람아, 나의 봄길도 너처럼

스스로 길을 내어 갈 수 있는

자족을 일러다오

 

 

 

 

 

 

 

간절한 꽃  /이만섭




이제 나는 나만의 꽃을 그린다
나무가 제 몸속에 나이테를 그리듯
그대를 향한 구심력으로
무지개의 맨 끝에서 찾은 자줏빛
원형의 붓질을 한다

그림이 완성되는 날
어떤 이는 바이올렛이라고 말할 것이며
또 다른 이는 현호색이라고도 말할 것이며
나의 회화가 생명으로 피어난다면
진정 더 바랄 게 있겠는가,

세상의 나무들은 봄꽃을 피우고자
긴 겨울을 나면서 
인동의 험난한 고비를 넘어왔을 것이다


나무가 꽃을 위해 그렇듯이
그대는 내게 이토록 가슴을 맹세케 한다

내가 그리는 꽃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목울대를 나팔관으로 키워 부르는

이 간절한 나만의 노래

 

 

 

 

 

 

 

 

 

 

 

 

 

 

 

 


 

아수라 백작의 내력 /이만섭

 

  

 

그리움이 사랑을 낳고

사랑은 이별을 낳고

이별은 눈물을 낳고

눈물은 애증을 낳고

 

참 무서운 사랑의 진화다

 

사랑은 감당할 수 없을 때, 스스로 분열을 일으킨다

 

빛에서 그늘로

그늘에서 어둠으로,

 

 

 

 

 

 

 

적멸을 얻다 /이만섭

 

                   

 

묘적사 대웅전 앞, 한낮

햇빛이 꼼짝 않는다

요사채 배흘림 기둥들 도열을 하고

마당 가운데 석탑도 이끼 입은 채

그 곁에 귀 열고 서 있는 행자목도 빈틈없다

해탈문 끼고 켜켜이 쌓인 돌담이며

절간 밖 비탈의 산죽나무도 고요로 멈춰 있다

모두 혼자 힘으로 다스리는 평정이다

오후 3시가 되자 법당에서 들려오는 송경 소리

각자 햇빛으로부터 얻은 그늘로

이들은 불당을 향해 예불을 올린다

와락, 청정도량이 숙연하다

 

 

 

 

 

 

 

은은했습니다  /이만섭  

 

 

 

어머니께서 팔순이셨을 때, 어느 날 친구 분과 백화점엘 다녀오신 얘깁니다.

그 봄날에 두 분께서는 새옷을 장만하러 가셨던 게지요.

당신 말씀인즉 난생처음으로,

기웃기웃 장구경 하시듯 돌아다니시다가 한 옷가게 앞에 서성이는데 

앳된 처자가 나와 상냥하게 웃으며 반기더랍니다. 

"금매 윗도리나 하나 볼라고 왔는디, 암만 혀도 맘에 드는 게 없어라우."

"호호, 그러세요 할머니! 안으로 들어오셔서 보세요."

"나 말은 그런 게 아니랑께요, 맘에 은은한 것이 웁서서 안 그러요" 하고

대꾸 하시니 그녀가 가만히 웃더랍니다.                           

그날 저녁 퇴근해서 들어온 제게 어머니는 와이셔츠 하나를 내려놓으시며

"오늘 백화점엘 갔는디, 다 봐도 은은한 거라고는 이것 뿐이드만" 하시는데 

당신 눈에 잡혀온 현호색 무늬가 은은함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잠시 어릴 적으로 돌아가

콩밭 메고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온 어머니의 젖무덤을 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은은하게 바라보시는 어머니 앞에 나도 고갤 끄덕이며 은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