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시인서재}

추억, 바람의 언어, 입술의 속성

이양덕 2009. 10. 3. 19:21

 

 

 

추억 /이만섭

 

  

 

갯벌에 사는 고동은

밀물이 빠져나가면, 다시 밀물이 들어 올 때까지 

펄 위에 몸을 긋고 다닌다

 

그것이

고동이 하는 일의 전부다

 

 

  

 

 

 

 

바람의 언어 /이만섭

 

 

난간과 난간 사이에서

히읗이나 시옷으로 시작하는 그의 발성법에

유심히 귀를 기울면 구개음에 가깝다

언제라도 야성으로 돌아가 

날짐승이 울듯 눈비가 몰아치듯

그만의 음운현상을 보인다

바람은 왜 까닭 없이

촉박한 언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풍경의 행간에 머물다가도 스스로에 겨우면 

그만 자취를 지워버리고 떠나는

허무맹랑한 흔적에서

늘상 피어 있는 꽃보다 지는 꽃잎에

심경을 드러내는 폐허의 말이었다

그렇기에 나무가 옷을 입을 때보다

옷을 벗을 때 더 바람답다

가로수길 따라 포도 위를 방황할 때도

허허한 벌판에서 들꽃의 귀밑머리를 스칠 때도

몸으로 쏟아낸 언어군이었다

시종 흘림체의 타성으로

저 비어 있는 허공을 쓰는 까닭에

그의 언어는 언제나 자유로웠던 것이다

 

 

 

 

 

 

 

입술의 속성 /이만섭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의 이름을 들었으나

나는 섣불리 발설할 수 없다

혀끝에 닿자마자 녹아버린다는

감미로운 중독성의 하이릴리프에 닿기 위해

안주 위에 젓가락을 구르며

그는 아까부터 노래하고 있다

술이란 서너 잔 들어가면 고만고만해져서

더 깊은 맛을 분별하겠는가

그래서 술꾼들은 술탐을 하는 것일까

그가 안주를 남긴 이유도

필시 온전한 술맛을 느끼고자 함일 것이다

얼근하게 달아올라 풀린 눈빛으로

마지막 잔을 비운 그가

안주 대신 제 입술을 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