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文學論}

김태형의 「코끼리 주파수」평설 / 홍일표

이양덕 2011. 8. 4. 22:17

김태형의 「코끼리 주파수」평설 / 홍일표

 

 

코끼리 주파수

 

  김태형

 

 

오래 굶주린 사자떼가 무리 지어 사냥에 나서듯

마른 땅에 갈기를 흩날리며 들불이 번진다

그곳에서도 물웅덩이를 찾아낸 코끼리 한 마리

느릿느릿 온몸에 검붉은 진흙을 바른 채

무겁고 차갑게 타오르는 황혼을 기다리고 있다

말라죽은 아카시아나무 숲과 흰 구름 너머

수 킬로미터 떨어진 또 다른 무리와

젊은 수컷들을 찾아서

코끼리는 멀리 울음소리를 낸다

팽팽한 공기 속으로 더욱 멀리 울려퍼지는 말들

너무 낮아 내겐 들리지 않는

초저음파 십이 헤르츠

비밀처럼 이 세상엔 도저히 내게 닿지 않는

들을 수 없는 그런 말들이 있다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오래고 오래되었으면

그 부르는 소리마저 이젠 들리지 않게 된 걸까

나무껍질과 마른 덤불로 몇 해를 살아온 나는

그래도 여전히 귀가 작고 딱딱하지만

들을 수 없는 말들은 먼저 몸으로 받아야 한다는 걸

몸으로 울리는 누군가의 떨림을

내 몸으로서만 받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물녘이면 마른 바닥에 먼 발걸음 소리 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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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몸의 시

 

 

   현실 개입 의지가 도드라진 시일수록 미학적으로 실패하기 쉬운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그런 시는 대개 경직되거나 일방통행적 메시지를 은연 중 강요하여 시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한다. 독자들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도 없고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여백도 없다. 여백이 없는 시는 대개 주절주절 긴 사설로 이어진다. 중언부언 설명하고 덧붙여 말하려고 한다. 시는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다. 압축의 절제를 모르는 시는 지루하여 금방 외면하게 된다. 윤리적이거나 정치적 의도를 앞세워서도 안 되고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도 안 된다. 시는 자신의 감각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따르는 것.

   김태형의 시는 현실에 기초하면서도 목청 높여 주장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면적 사유의 맥을 잘 견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코끼리 주파수」는 수다스런 요설로 이어지지도 않고 정감이 거세된 건조한 설계도 같은 시도 아니다. ‘코끼리 울음소리’는 파괴된 삶의 실체이고, 시인이 표출하고자 하는 심층적 의미이다. 그러나 근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둡고 차가운 귀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산다. 이것이 비극적 삶의 한 풍경이다.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이 삶은 피폐해지고 삭막해진다. '나무껍질과 마른 덤불로 몇 해를 살아온' 화자 역시 너무 작고 희미하여 듣지 못하는 소리와 말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떨림’과 ‘들을 수 없는 말들은 먼저 몸으로 받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여기서 ‘몸’은 관념이나 차가운 이성이 아니다. 말 그대로 온몸이며 전체이다.

   마지막 한 행이「코끼리 주파수」에 가볍고 섬세한 날개 하나를 달아준다. ‘저물녘이면 마른 바닥에 먼 발걸음 소리 울려온다’ 비로소 화자가 온몸으로 세상의 떨림과 작고 미미한 소리까지 감지하는 순간이다. ‘마른 바닥’ 은 시인의 예민한 촉수요 안테나이다. 이것이 작동하는 순간 세상의 어둠도 잠시 기우뚱하는 것이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