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文學論}

김태형, 「그게 배롱나무인 줄 몰랐다」감상 / 고규홍

이양덕 2011. 8. 12. 09:27

김태형, 「그게 배롱나무인 줄 몰랐다」감상 / 고규홍

 

 

그게 배롱나무인 줄 몰랐다

 

   김태형

 

 

오래된 창문 밖에 마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팔뚝만한 누런 가지 사이로

아침마다 마당을 쓸던 늙은 아저씨

말갛게 젖은 겨드랑내가 났다

날이 풀려도 저 나무는 꿈쩍도 않은 채 제 껍질만 벗

고 있었다

구렁이가 혹 겁도 없이 하늘로 오르려 했을까

벼락을 맞고는 그만 나무로 말라죽었나 싶었는데

날름 여린 혓바닥을 밀어내고는

뒤늦어서야 어디가 가려운지 샛바람에 잎들을 파르르

떤다

그게 배롱나무인 줄은 몰랐다

그 동안 누가 저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등줄기가 가려울 때마다 몇 차례 누런 허물을 벗고

딱딱한 비늘에 윤기마저 도는지

세 치쯤 되는 공중이 이내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한다

초여름쯤 여린 꽃망울을 터뜨리기까지

저 나무는 어린 새를 한 마리 잡아먹을 것이다

작은 못물을 다 마셔버릴 듯이

밤낮없이 백 일을 더 울어

바람처럼 제 붉은 꽃을 마저 삼켜버릴 것이다

그게 배롱나무라고 누군가 일러주기 전까지 저 나무

는 고요히

제 타오르는 불꽃을 안으로 삭이며 한껏 메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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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끈한 표면이 마치 간지럼이라도 탈 듯한 나무, 배롱나무다. 나무는 제 붉은 속살에 꽂히는 숱한 눈길이 부끄럽기만 하다. 부끄럼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나뭇가지가 온종일 살랑인다. 여름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 해서 처음엔 ‘백일홍나무’라고 불렀다. 세월 흐르는 동안 소리 나는 대로 쓰면서 배롱나무라는 한결 예쁜 이름을 얻었다. 붉은 꽃은 여름의 붉은 정열을 닮았다. 한 송이 작은 꽃이 떨어지면 곁에서 다른 꽃송이가 입을 연다. 여름 내내 붉은 꽃이 불꽃처럼 타오른다. 배롱나무 꽃 바라보는 사람의 그윽한 눈길 따라 여름이 깊어간다.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