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文學論}

정진규의「숲의 알몸들」평설 / 오태환

이양덕 2011. 12. 9. 10:14

정진규의「숲의 알몸들」평설 / 오태환

 

 

 

 

 

 

 

   올해는 대설주의보가 잦았다 회사후소繪事後素로 한밤내 눈 내린 아침 화계사 청솔 숲 작은 암자 한 채로 기울고 있었다. 눈빛 흰빛 음덕이 있다 직립直立이란 없다 서로를 버티게 해주는 이쪽 저쪽의 힘을, 사방 기울기를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내린 눈들의 무게와 흰빛들의 비유가 숲의 알몸들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건너뛰는 청솔모의 속도마저 한눈에 가늠할 수 있었다 나무들의 사이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건드리면 쨍 소리를 낼 듯 공기들의 살얼음이 팽팽했다 이쪽 청솔이 오른쪽으로 기운 만큼 그만큼만 저쪽 청솔이 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런 사방 기울기의 연속무늬를 보았다 오늘 아침은 눈들이 담아 온 하늘 무게만큼 조금씩 더 기울고들 있었다 슬픔의 중량이 어제 오늘 더해졌다 하나

 

 

    ―정진규, 「숲의 알몸들」(『현대시학』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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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는 큰눈이 내린 어느 날 아침 화계사 근처의 숲을 거닐고 있다. 숲을 촘촘히 채운 청솔들은 간밤에 내린 눈의 무게 탓에 일제히 가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다. 그런데 원경과 근경을 빼곡 메운 청솔가지들은 모두 어슷비슷한 기울기로 기울어졌다. 눈의 무게로 축축 휘늘어진 나뭇가지들은 마치 서로 다른 각도로 나란히 선 몇 장의 거울 속에서 난반사되는 것처럼 무수한 상像들을 끝없이 복제하며 증식한다. 흰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청솔가지들의 깊고 맑은 기울기. 그 기울기들이 사방연속무늬로 마침내 다다른 소실점에 화자의 슬픔이 도사리며 다시 청솔가지를 휘청 기울이고 있다. 그 슬픔의 내막은 무엇일까? 이 시가 베끼는 풍경의 정황과 세목에서 그 뜻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겠다.

 

 

   완당阮堂의 「세한도歲寒圖」에서 갈필渴筆의 농담濃淡으로 지지른 격절隔絶한 세계가 베끼는 것은 지절과 견개이며, 그 지절과 견개에 대한 감동이다. 물론 이 시가 그렇다는 뜻이 아니다. 그 고담枯淡한 미감도 한유寒儒의 외롭고 오연한 기개도 비치지 않는다. 내가 겹쳐 읽은 것은,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날카로운 예각의 희디흰 눈빛이 감싸는 전경과, 서슬에 장력을 더하는 묵적墨跡의 삐침이다. 필법이 흡사하다는 뜻도 아니다. 완당의 것에는 몰골沒骨이니 구륵鉤勒이니 하는 기법이 무색하다. 한 파람에 다 날아가고 남은 것은 때로 흐리고 때로 짙은 붓자국일 따름이다. 그에 비해 시인의 것은 정교하다. 얼핏 갈필인 채로 칠해진 것 같지만 붓자국의 앞뒤 마구리가 삼엄하다. 이 작품과 「세한도」의 교집합은 눈의 흰빛과 묵빛이 서로 간섭하면서 불거진, 살얼음처럼 금방이라도 깨어져 가뭇없이 사라져 버릴 듯이 팽팽하게 긴장된 공간이다. 그 공간은 그냥 틈이고 각도다.

 

 

   그 안에서 “슬픔의 중량”이 청솔가지를 기울이고 있다. 눈 내린 겨울 아침의 숲. 거기서 일제히 가지를 아래로 늘어뜨린, 툭! 툭! 금세 설해목雪害木으로 가지를 부러뜨리고 말 것 같은 나무들의 원경과 근경……. 눈의 흰빛과 눈에 젖은 가지의 검은빛, 그리고 겨울 아침 춥고 매운 공기의 투명함 때문에 세계는 더없이 맑고 깨끗하다. 그래서 몇 장의 거울 안에서 무한히 반사되는 피사체를 바라보는 것처럼 세계는 분명히 원근법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정밀靜謐하다. 그 안에서는 다른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합해서 다 볼 수 있다. 풍경의 맑고 깨끗함은 동시에 그걸 바라보는 자의 눈[眼]까지 맑고 깨끗하게 씻어 준다. 이 투명하고 정밀한 세계에서는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건너뛰는 청솔모의 속도”도, “내린 눈들의 무게와 흰빛들의 비유”도 모조리 눈치챌 수 있다. 이때 “슬픔의 중량”과 “내린 눈들의 무게와 흰빛의 비유”가 고스란히 겹친다는 건 내남없이 알 일이다. “내린 눈들의 무게와 흰빛의 비유”는 “슬픔의 중량”이다. 이 시에서 “슬픔의 중량”은 소위 낙성관지落成款識를 환기한다. 특히 남종문인화에서, 제발과 마찬가지로 낙관落款은 단순한 공리적 소품으로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다. 제발이 그림에 대한 부연의 뜻 말고 그림과 뒤섞인 채 조형미에도 봉사할 때가 많은 것처럼, 낙관은 그 붉은빛으로 수묵水墨의 꺼진 재와 같은 단조에 화룡점정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조형의 한 요소로 작용할 때가 많다. 완당의 「불이선란不二禪蘭」 같은 걸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슬픔의 중량”에서 낙성관지를 떠올린 것은, 그 부분이 시상의 마무리를 봄과 동시에 또 다른 방향으로 의미를 확산시키며 간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눈의 흰빛과 눈에 젖은 가지의 검은빛 위에 낙관처럼 붉게 찍힌 “슬픔”은, 비록 완당에서 보이는 화폭 전체에 임리淋漓한 흰빛 틈과 예각처럼 고답적이지는 않을망정 관념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이 “슬픔”은 우주적 연민의 낌새를 비친다. 그것은 개인의 체험으로부터 연유한 것 같지 않다. 이 세계가 어느 순간, 무심히, 언뜻, 펼쳐보이는, 천지에 공기처럼 편재遍在한 사람살이의 숙명론적 비극의 기호를 또한 무심히, 서럽게, 보아 버린 데서 발원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관념에 가깝다고 해서 화자가 그 안에서 와유臥遊하고 농월하고 있다는 건 아니다. 관념이지만 관념 같지 않다. 오히려 개인의 체험에서 비롯된 슬픔보다, 비록 건조할지언정 훨씬 내밀하고 웅숭깊은 떨림을 반향한다. 이 “슬픔”은, 한밤내 내린 눈의 무게로 청솔가지가 부러지기 직전 “서로를 버티게 해주는 이쪽 저쪽의 힘”의 아슬아슬하고 투명한 균형과 그것을 지탱하는 고통을 담는다.

 

 

   시인은 ‘회사후소會事後素’에 “그림 그리는 일은 그 바탕이 희게 극복된 다음이라야 한다는 뜻의 『논어論語』 일구一句”라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이 말은 애초에는 예禮와 바탕[質]의 선후 문제에 관한 담론이었으나, 수묵산수水墨山水가 흥륭한 성당盛唐 이후에 이르러 그림에 관한 담론의 한 형식으로 쓰여진 것 같다. 신주니 구주니 해서 구문 자체의 해석뿐만 아니라 쓰임새에 대한 논란도 여태 분분하다. 나는 일단 시인의 주석에 덧칠을 한다. “회사후소로 한밤내” 내린 눈은 세계를 흰빛으로 덮고 있다. 바탕이 희게 마련된 다음에 비로소 그림이 이루어지듯이 흰빛으로 감싸인 세계는 그적까지 비유와 상징의 코드 안에 마련해 두었던 자신의 비밀을 슬며시 드러낸다. “숲의 알몸”과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건너뛰는 청설모의 속도”와 청솔가지가 만드는 “사방기울기의 연속무늬”가 다 흰빛의 세계 속에서, 아니 흰빛의 세계 때문에 비로소 선명해진다. “회사후소로” 내린 눈은 앞서 이미 말했지만, 외관만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의 심안心眼까지 밝게 한다.

 

 

   바탕이 희게 극복된 다음(後素)에 화자의 시야에 잡힌(繪事) 것은 “슬픔의 중량”이다. 이것은 세계를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아슬아슬하고 투명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정진규 시인의 다른 시편에서 이 “슬픔의 중량”은, “서로를 지탱해주는 이쪽 저쪽의 힘”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며 각각 다른 무늬와 농도로 변용한다.

 

 ( * 이 글은 필자의 「그, 발묵과 설채의 조촐한 향기 또는 회사후소의 시학」의 일부임. )

 

 

오태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