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文學論}

박용하의 「낮 그림자」평설 / 홍일표

이양덕 2012. 6. 21. 07:16

박용하의 「낮 그림자」평설 / 홍일표

 

 

 

낮 그림자

 

   박용하

 

 

내 맘대로 안 되고

내 뜻대로 안 된다

 

그건 서글픈 일

조금 고요한 일

 

내 그림자조차

내 맘대로 안 된다

 

그건 서러운 일

조금 호젓한 일

 

도대체 내 몸대로

할 수 있는 게 뭐람?

 

비빌 언덕이

자기 자신밖에 없고

 

나하고 놀 사람이

나밖에 없는 사람

 

그건 쓸쓸한 일

조금 꿈같은 일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내가 손볼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다

 

그것조차 쉽지 않다

 

나는 나한테도

수없이 당한 사람이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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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빛의 언어

 

 

   박용하 시인이 양평 오빈리에 칩거하면서 건져 올린 시의 열매들이 최근 간행된 시집 『한 남자』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무성한 이파리의 시절을 지나 흰 뼈의 시간에 당도한 시인의 서늘하면서도 깊은 시의 언술들은 삶의 뒤편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이한 마력을 지녔다. 정련된 편편의 시들에는 고열의 시간을 거쳐서 나온 칼의 번득임이 있다. 그 광휘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견뎌온 고적의 역정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어느 누군들 아프지 않고 이승의 삶을 통과하지 않는 자는 없지만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고스란히 시간의 폭력적 위압을 견디고 뼛조각의 적요함으로 발언하는 시인의 언어는 흰 빛이다.

   그의 시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반짝이면서 날카롭게 가슴을 저미어 온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죽어 있는 나를 만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하는 시들이다. 그 사이 너절한 일상의 기억들은 사라지고 오롯이 삶의 실체를 직면하게 되면서 일상의 뒤란을 뒤적거려 보게 한다.

   시인은 흰빛의 시간을 온몸으로 직시하고 독하게 견딘다. 외로움은 필수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방적으로 눈앞으로 다가온 시간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시의 칼날은 예리해졌고 시야는 더 넓고 깊어졌다. 그가 대적하고 있는 상황들도 구체적이면서 명료해졌다. 군더더기 없이 짧은 호흡으로 이어나가는 가지런한 리듬감과 형식의 균제미 또한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시인의 삶이 시의 형식을 결정지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낮 그림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쓸쓸하다. 극한의 외로움의 순간에 존재는 투명해진다. 이때 시인은 낮도깨비가 되어 제 그림자를 망연히 들여다본다. 현실은 물론이고 그림자조차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무력감에 시달리는 화자는 이런 상황은 서글프고 서러운 일이지만 호젓하고 고요한 일이라고도 한다. 상반된 정서는 서로 충돌하면서도 합치된다. 현실적으로는 서글픈 일이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존재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내밀한 시간은 고요하고 호젓한 일인 까닭에 그 시간과 상황을 조용히 끌어안는 것이다. 그리고 시적 사유의 공간이 조금 더 확장된다.

   “도대체 내 몸대로 / 할 수 있는 게 뭐람?” 자조적인 독백이 처연하면서도 애틋하다. 화자는 무력의 극단에서 다시 자기를 성찰한다. 그러나 “나하고 놀 사람이 / 나밖에 없는” 비극적 정황과 마주치게 된다. 철저히 혼자다. 쓸쓸한 일이고 고적한 일이지만 곧바로 “조금 꿈같은 일”이라고 상충되는 정서를 제시한다. 비극을 비극으로 보지 않고 반전의 전환점으로 삼아 눈앞의 현실을 뛰어넘고자 한다. 여기서 견자로서의 시의 화자를 발견한다. 그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부정적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생의 바깥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내가 이기고 손볼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러한 “나”도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존재의 무화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낮 그림자’로 돌아간 화자는 이미 순간, 순간 소멸하고 사라지는 존재의 안팎을 두루 보아버린 견자이다. 역사도 이데올로기도, 부처나 예수도 화자에게는 한낱 ‘낮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자기 자신이 종교이고 구원인 자”(「커피와 담배」)로서 화자는 흰 빛으로 사라지는 사물의 뒤통수를 처연히 바라보는 자이다. 소설가 김도연이 박용하의 시집을 “무섭다”고 한 이유가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