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시인서재}

낙서들 ㅡ 이만섭

이양덕 2012. 11. 8. 11:00

 낙서들

 

이만섭

  

 

 

이 필사본은 타인의 이름을 제 이름으로 몰래 베낀 불온한 증거다

 

누군가 면벽의 고루함을 얻지 못해 제 이름으로 바꿔 쓰기까지 몽상들은 장소를 불문하고 얼마나 채근하고 들었나,

 

어느 달밤 술주정뱅이가 소피를 누고 간 곳이라도

흠흠- 냄새를 즐기며 사생아를 낳듯이

은밀히 기록한 문자들의 지리멸렬한 표정은 편벽에 가깝다

 

풍문처럼 떠도는 말을 키우는 담벼락을,

마침내 누가 엿보고 있다 온갖 냄새 무릅쓰며 가로등이 따뜻해질 때까지

퀴퀴한 자리도 괜찮다는 듯 그는 가슴에 부끄러움을 옴팍 감춰놓고

가파른 벽을 타며 벽 속의 말을 쫓아가는 사람

 

저 말들은 자신의 속말로 새기고 싶어

타인의 이름조차 날카로운 쇠꼬챙이로 그어댔겠지

 

회벽을 찢고 나온 음각들이 속살이 파인 듯 상처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