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시인서재}

저 사라진 가을 자리에 ㅡ 이만섭

이양덕 2012. 12. 4. 06:45

 

 

 

 

 

저 사라진 가을 자리에

 

  이만섭

 

 

 

뒤란의 오동나무가 베어졌다

회색 담장 뒤편으로, 어릴 적 할아버지는

집안에 잎 큰 나무를 들이지 말라 하셨는데

아버지의 계절은 그렇게 가고

그 무렵처럼 오동나무 사라진 곳을 망연히 바라본다

길이 뚫린 듯 북방이 휑하다

저 오동나무 베인 자리 오래 바라보면 누군가 찾아온다

붉은 노을 거둬가고 하늘 무거워질 때

텅 빈 마당을 밟고 오는 손님

처마는 가지런히 두 팔을 벌려

어둑어둑 깊어가는 집을 허공으로 들어 올린다

동그마니 귀퉁이로 남은 마당에 달빛 물결 넘실거리면

오동나무 그루터기에 드는 푸른 빛

한 진인이 앉아 피리를 분다

나무여, 나무여, 한 시절 푸르자고 심은 나무여!

제풀에 희미해진 정처 없는 시간

저녁 빛에 가려지는 정체를 드러내어

진인의 피리 소리를 따라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