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시인서재}

그늘의 초상 ㅡ 이만섭

이양덕 2013. 4. 28. 06:39

 

 

 

 

 

 

 

 

그늘의 초상 /이만섭

 

 

 

 

저녁 무렵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등 뒤의 그늘을 따라나선다

내 것인데도 여태껏 배웅 한 번 못하고

무수히 지나친 이 방관적 소멸을

나는 왜 새삼스레 찾아나서는 것일까,

묵묵히 사라지는 저 허전한 뒷모습에도

내 익숙한 체취가 오롯이 배어 있어

가시권 밖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데

그늘이 사라진 자리가 동그마한 공터 같다

그곳으로 한 순간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가 지워진다

어슴푸레한 난간에 흰 깃발을 내걸고

사라진 그늘의 환영처럼, 쓸쓸한 정령으로

나의 발길을 되돌리려고 경계선을 긋는 것일까,

그럼에도 내 몸의 자취라는 생각에

육체 이탈한 몽매를 위로하고 싶은데

그런 나를 그려내고 싶은데

손 내밀어도 닿지 않는다

그늘이 소멸하는 내력에 대해 노심초사하는데

사라진 그늘의 출구처럼 자작나무 숲이 병풍을 두르고 온다

갑자기 등 뒤가 환해지는 듯

저만치에 *천 년을 견딘 바잇덩이가 길 든 양처럼

어둠 저 편에서 건너오는 것이었다

 

 

*금화산에서 도를 닦던 황초평이 신선이 되어 바위를 빵으로 변하게 했었다는 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