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은 때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하지만
희망의 응급처치를 싫어하는 인간도 때로 있을 수 있네,
아마 그럴 수 있네,
절망이 더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
약을 구하러 멀리서 왔는데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믿을 정도로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인데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
삶이 내게 주는 것보다 뺏아가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되는 순간 삶은 저 안쪽에서부터 무너진다. 절망은 희망의 부재가 낳은 사태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연옥에 갇힌 주체의 의지와는 무관한 삶의 내달림이다. 정신적인 소모, 기댈 데가 없는 막막함, 의미의 고갈 따위에서 절망의 비릿함을 맛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절망이란 일종의 극한 순간이다. 절망보다 희망이 더 외롭다고 말할 때, 그 절망은 이미 갈 데까지 가버린 상태다. 즉 절망과 함께 잠을 깨고 절망과 함께 밥을 먹고 절망과 함께 잠이 든다면, 절망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삶의 부정적인 한계”(에밀 시오랑)로서의 체험일 테다. 시인은 절망에 충분히 길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절망[에서] 중력의 평안”을 느낀다고 담담하게 털어놓을 때 시인은 이미 골수까지 절망에 감염되어버린 가여운 넋이다.
절망과 연관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시지프스의 커다란 돌이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 등 온통 인간적인 확신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헤아릴 수 있는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시지프스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알베르 카뮈 《시지프스의 신화》) 카뮈는 이 돌을 통해 인간의 삶이 안고 있는 부조리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돌은 무엇인가. 이것이 절망은 아닐까.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복합적이고 불투명하다. 그 불투명한 막(膜)에서 번성하는 것은 공허와 무질서다. 공허는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피로, 짜증, 교만 따위로 채워진다. 이것들은 절망의 경미한 징후들이다. 이 시에서 절망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다. 이 범박한 독백의 말에는 절망의 바닥까지 가본 자만이 감히 할 수 있는 깊은 체념의 무게가 실려 있다. 시의 화자는 절망했으되 절망을 붙잡고 몸부림치지 않는다. 이미 절망에서 초탈해진 마음은 평정에 가 닿고, 그 마음에 깃든 것은 평온함과 심심함이다. 평온과 심심함을 꿰뚫는 것은 투명함이다. 그 투명함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며 본질로서 명철함에서 나온다.
〈희망이 외롭다 1〉는 절망의 시인가, 아니면 희망의 시인가. 이것은 절망의 시다. 시의 화자는 희망이 남김없이 바닥나버린 상태에 놓여 있다. 절망이란 본디 그것에 빠진 사람의 넋을 앗아갈 만큼 강렬하고 압도적인 것인데, 이 시에서는 일상화, 범속화되어버린 상태다. 시의 화자의 고백에 따르면, 절망에서 “중력의 평안”을 느끼게 할 정도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의 화자는 그 절망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희망은 항상 희망이 없는 곳에서만 나타난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는 자의 처절한 외로움에 대한 독백이 이 시의 내용이다. 결국 이 시는 희망의 외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버린 그 밤” 같은 구절에서 우리는 그 절망의 깊이를 흘낏 엿볼 수 있다. 그 절망의 극한에 서 있는 순간에서조차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불쑥 “당신”이란 존재가 튀어나온다. 시의 화자가 직면한 절망은 그 병이 깊어진 “당신”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병이 깊어진 “당신” 앞에서 “당신”의 회생에 뿌리를 내린 내 희망이란 한낱 “응급처치”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희망보다 절망을 더 쉽게 견딜 수 있다. “힘을 다 빼고”, 즉 포기와 체념을 하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니까. 하지만 희망을 견디는 것은 힘들다. 희망이란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절망은 불운에 주저앉고 탈진해버리면 그만이지만, 희망은 여전히 피를 흘리며 살고, 더 뜨겁게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희망은 병이 깊어진 “당신”, 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탈진과 고갈에 이른 내게 희망은 그것들을 견디고 끝끝내 살아남으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희망은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을 가져온다.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
절망은 존재 이유에 대한 부정을 만든다. 절망한 자들은 세계가 망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절망해서 삶의 끈을 놓아버리려는 자들에게 빈혈과 창백함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희망을 품고 살아보려는 자들에게만 빈혈과 창백함이 문제다. 희망의 본질이 살라고 하는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삶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지경인데, 희망은 내게 살라고 한다. 희망이란 말은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 막는다”. 희망은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든다. 절망이 우리를 속이는 법은 좀처럼 없지만 희망은 우리를 자주 속인다. 그래서 희망은 절망보다 더 가혹하다. 아울러 우리는 희망의 종신형을 선고받은 채 그 가느다란 끝을 붙잡고 살아가는 죄수들이다.

사진 : 김선아

김승희(1952~)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나왔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는 재기발랄한 스물한 살에 시인이 되어, 마흔 해 가량을 시인으로 살았다. 《태양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같은 김승희의 초기 시집들에는 환상이 넘쳐난다. 현실의 남루에 대한 보상으로 제시했던 그 환상들은 충분히 어여쁘고 이채로웠다. 환상은 그만의 리얼리즘이었다. 그가 환상을 버리고 현실의 남루 그 자체에서 시를 길어 올렸을 때 나는 조금 실망했다. 그가 서양신화를 불쏘시개 삼아 환상을 지펴 자신의 리얼리즘으로 삼았을 때 그는 유일한 시인이었지만, 현실의 남루에서 상상의 동력을 구했을 때 그는 하고 많은 시인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근래에 새로 나온 시집 《희망이 외롭다》를 펼쳐 들고, 오랜만에 김승희의 시를 다시 읽는다. 여전히 시를 쓰고 있는 그는 “머리는 찬 서리로 시려서 대낮에도/송이송이 타오르는 화관을 몇 겹씩 써야” 했던 조선시대 허난설헌에 빙의되어 그 뼛속을 들여다본다. “자기를 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아서 대낮에도/붓 한 자루에 언덕을 넘고자” 했던 난설헌을 보고, 그 뼛속에 가득한 “땅에서 하늘까지 번개가 흐르고/부용꽃 스물일곱 송이”(<난설헌의 방>)를 노래한다.
_ 톱클래스 2013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