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시인서재}

보리차를 끓이며 - 이만섭

이양덕 2016. 10. 23. 09:20








보리차를 끓이며


  이만섭


  

다반사인 양 또 보리차를 끓인다.

주전자 속 둥둥 뜬 겉보리 알갱이들,

가마솥에 누렇게 볶아낸 춘궁기 시절의 총아들,

찬물에 간 맞추듯 두어 스푼 넣고 우려 가며

구수한 냄새를 기다린다.

보리의 숨결이 남풍을 타고 실개천 건너오듯 가붓하다.

유월의 뜰은 가난해도 평온하기만 하여

부엌은 그 옛날의 부뚜막 같아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어머니가 구들에

군불을 지피는 저녁을 들여다보듯

애써 탁자에 붙어 콧구멍으로 김 뿜어내는 주전자를

넌지시 바라본다. 이런 마음은 참으로

옛 벼루에 송연먹을 가는 기분이어서

재가 되어서도 소나무는 숨결로 향기 전해주는 것만 같아

보리를 우려내는 마음은 은근히 정갈해져

이 소박하고 조촐한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잠시 열어 젖혀둔 창을 닫고

묵가의 교상리(交相利) 예법을 익히기라도 하듯

설설 끓는 보리 냄새는 구석구석 번져가서

음식물 냄새에 찌든 개수대를 지우고

그곳에도 정중히 차 한 잔 건네듯 

어느덧 부엌의 노고를 위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