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시인서재}
지우개 사용법 ㅡ 이만섭
이양덕
2019. 1. 27. 19:59
지우개 사용법
이만섭
반듯하게 필사된 노트 머리맡에
깍두기처럼 놓인 채 솔솔 석유냄새 풍기는 지우개는
새로운 답안지를 작성중이다.
노트는 닫혀 있고 자신이 먼저 와 기다리는데
연필은 언제 굴러올 것인가,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일상이 빠르게 틀에 박힌다.
지울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많은데
함부로 쓴 필기체의 획이 노트의 모눈선 밖으로
자음과 모음이 일그러져 있어도
저마다 자신의 필적에서 예외라는 듯
여전히 지울 수 없는 그것은
인쇄체에서 발견되는 오자와 탈자들
글이 되지 못하면 말이 되지 못하는 문장에서
불문곡직하고 지우개를 원하는데
이때의 지운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
지우지 않고 지워지는 일은 망각이 하는 일
잘못 써간 행간에서 지우개의 손에 이끌려 빠져나온 글씨들이
다시 태어난 듯 표정이 새틋하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쓴 글씨 곁에 지우개가 놓인 까닭은
낙서로 전락할지 모르는 문장 때문이지만, 그보다도
흰 페이퍼 곁에 지우개를 둔다는 것은
마땅히 내 안에 굴신을 몰아내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