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시인서재}

이백만 년 동안의 비

이양덕 2020. 8. 11. 10:40

 

이백만 년 동안의 비

 

 

 

                                                   이만섭

 

 

  

   비는 지속적으로 흘러내렸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행군하는 보병처럼 주어진 트랙을 확장해가며 막대같이 꽂히는 빗줄기의 열기는 세상의 창을 뿌옇게 흐려놓고 턱밑까지 차오른 빗물을 헤엄치는 나무들은 녹음을 머리에 인 채 여름을 건너가고 있었다새가 날지 않는 공중이 계속되었다 속수무책으로 퍼붓는 비의 횡포를 아무도 막아낼 순 없었다 동굴은 박쥐처럼 더 깊이 숨어들고 강물은 역류해 와 대지를 잠식해갔다 옹기종기 생명들 모여 생각 없이 퍼붓는 비의 정체를 곱씹으며 분명코 트라이아이스가 다시 찾아온 거라며 밤잠을 설친 퀭한 눈동자로 빗물을 주시했다 누가 태양을 훔쳐 갔을까 한때 달빛 아래 투덜거리던 외로움이란 것도 돌이켜보니 자만이었다고 뉘우치며 별의별 심사가 곡두로 드리웠다 기상청은 말을 잃었고 답답한 나머지 지도를 꺼내 놀란 토끼의 귀 같은 한반도의 정수리를 올려본다 절벽으로 깎아지른 블라디보스토크의 리아스식 해안이 태평양 물에 잠식되고 있었다 연해주에서 캄차카반도까지 온통 수묵색으로 물들이며 오호츠크해의 바닷물을 수천만 개의 양동이에 담아 마구 퍼붓는 동북아 난층운은 교자상에 시루떡을 엎어놓은 듯 거대한 비의 축제에 무게를 더했다 모래바람이 사막을 횡단해도 오아시스를 비켜가든가 어디선가 빗물을 가르는 노랫소리 하늘의 말씀을 풀어 천지간을 정복한 비의 내력을 해독하기 시작하듯 이백만 년 동안의 빗속을 노저어가는 방주에 실려 오고 있었다 그대 빗속에서 세상이 다할지라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이것뿐이라는 듯 평화를 염원하는 노랫가락에 흩어진 귀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