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완성하는 관계의 화룡점정畵龍點睛/한기욱
예술을 완성하는 관계의 화룡점정畵龍點睛/한기욱
시인 윌리엄 스탠리 머윈은 “현대 시인은 허공을 극복할 수 있는 사다리를 매고 다니는 인간”이라고 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 비어 있는 공간을 극복할 수 있도록 고안된 언어의 사다리가 바로 ‘시’라니. 시를 쓰면 왜 어깨가 무겁게(?)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독자는 시인이 만들어 낸 언어의 사다리를 스스로 용기 내어 올라가야만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때로는 “발을 딛는 단(시어)만 보지 말고 발을 딛는 단(시어)과 단(시어) 사이의 빈 공간 (표현되지 않은 의미)도 음미하면서” 천천히 올라야 하겠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때로는 단과 단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멀어 독자는 발을 헛디디거나 구멍에 빠지는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는 시인과 독자의 보이지 않는 문을 열어주는 손길”이라는 한태호 비평가의 말처럼 시인의 사다리를 올라가 마침내 만나게 되는 문, 그 문을 열고 만나는 황홀한 경험을 독자는 잊지 못하고 또 사다리를 찾아 오르는 것이리라.
하지만 준비된 독자가 아니라면 ‘잭과 콩나무’의 주인공처럼 미지의 세계로 용감하게 오르지 못하고 주저 할 수도 있다. 또 요즘은 미지의 세계를 간편하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다양한 매체들도 많으니 눈앞에 사다리가 놓여있다고 한들 선뜻 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여 지난 계절에 내가 경험한 사다리를 소개하며 함께 다시 올라가 보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첫 번째 사다리: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삼키듯 사과를 움켜쥐었다
뜨거운 뺨의 이유를 흰 바람 속에서 읽었다
태양을 껴안고 오후 네 시를 지나
봄밤에 나비 떼가 날아온 길을 걷는
등피에 힘줄이 꿈틀꿈틀 솟구쳤다
허공에서 빛살 한 가닥 붙잡고 당신을 위해
독이 든 마녀의 사과가 될 수도
액자 속에 영혼 없는 감상품이 될 수도
코끼리에게 밟혀 뭉개질 수도 없었다
달콤한 과육은 은쟁반에서 미끄러지듯
그대의 발그레한 혀를 삼키고 싶었다
생명의 신비를 산란한 빛의 파장은
수만 광년의 거리에도 분절되지 않고
몸을 활활 태워 사과에 빨강색을 입혔다
꽃의 웃음소리가 슬픔을 지울 때
손가락은 하늘가에 해시태그 찍어 놓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정경의 유화를 그렸다
포름 알갱이 범벅된 땅에 흰 눈이 내리고
타락한 욕망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세잔의 사과가 돌아왔다
-이양덕, 「사과를 삼킨 빨강」, 《시문학》(2021년 3월호)
예술가 모리스 드니는 “역사상 유명한 세 개의 사과가 있다. 첫째가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가 뉴턴의 사과이며 셋째가 세잔의 사과다”라고 말했다. 시인은 이 세 개의 사과 중에서 ‘세잔의 사과’를 주목한다. 폴 세잔의 ‘사과’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사물을 바라보는 차별화 된 시점에 있다.
당대의 미술가들이 사물의 색에 집중하던 것과 달리 폴 세잔은 “‘보이는 실체’와 ‘인지되는 실체’가 서로” 다른 것이며 “우리의 경험과 기억에 의해 번안된 실체가 아니라, 보는 순간 생생하게 다가오는 감각적인 경험, 곧 ‘날것으로서의 실체’를 그려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시·공간에 따라 보이는 형태에 집중했다. 시인 역시 불변하는 의미의 박제된 대상이 아닌 방향과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각적 경험’을 강조하면서 박제된 시각을 강요하는 사회에 자유로운 감각적 표현들의 재현을 선언하고 자 사다리를 만든 듯하다.
화자는 붉은(빨강) 사과를 바라보는 단순한 경험을 ‘삼킬 듯 사과를 움켜쥐’는 적극적인 행위로 치환하면서 ‘뜨거운 뺨의 이유를 흰 바람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감각적 경험으로 재현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에게 ‘사과’라는 존재는 둥근 형태를 지닌 새콤달콤한 맛의 붉은 과일에 지나지 않으나 화자의 감각적 경험에서 재생되는 사과는 둥근 형태를 지닌 소우주로써 ‘태양을 껴안고’ ‘몸을 활활 태’우는 주체이면서 가장 뜨겁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온 실체이다. 특히 ‘오후 네 시’로 지정되는 시간은 아벨리 노통브의 『오후 4시』의 주인공처럼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는 시간으로 중첩되면서 ‘뜨거운 뺨’을 갖게 된 실체의 ‘감각적 경험’을 재현하는 원천으로 다가왔다.
더 나아가 창조적 숨결을 지배하는 1차적 대상인 ‘흰 바람’ 속에서도 뜨거움을 잃지 않을 정도의 생명력과 기운을 지닌 존재로 완성된 ‘사과’는 ‘등피에 힘줄이’ ‘솟구’치는 강렬한 존재감을 뽐낸다. 그 존재감은 ‘독이 든 마녀의 사과가 될 수도/(『백설 공주』의 사과), 액자 속에 영혼 없는 감상품이 될 수도/(세잔 이전의 대상 그대로의 평범한 사과 작품들)/ 코끼리에게 밟혀 뭉개질 수도 (먹이가 되는 사과)’있는 대상이라는 프레임 속에서도 ‘허공 속에서 빛살 한 가닥을 붙잡고 있는 당신’의 고통을 ‘달콤함’으로 바꾸기 위해 스스로 ‘빨강색’을 입혀버린 생동감 넘치는 주체로서의 존재다. 하지만 지나친 달콤함은 자칫 사과 자체의 본질을 상실하고 ‘그대의 발그레한 혀를 삼키는’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달콤함은 때로 진실을 침묵하게 한다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사과의 다중시점의 하나로 날것 그 이상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마지막 발판 앞에서 ‘세잔의 사과가 돌아왔다’라는 선언을 한다. ‘포름 알갱이 범벅된 땅’, ‘타락한 욕망의 눈물’을 흘리는 불온한 현실 속에서도 회복의 ‘흰 눈’이 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세잔의 사과’에서 찾고 있다. 다만 그 회복을 위한 첫걸음은 수용적인 태도의 전통을 거부하고 ‘꽃의 웃음소리’ 뒤에 지워진 ‘슬픔’의 실체를 보거나 다양한 프레임에 갇힌 ‘사과’가 아닌 날 것 그대로 다양한 시각에서 말하는 방법을 통해서일 것이다. 이제는 ‘빨강’이 ‘사과’를 삼키지 않도록…….
두 번째 사다리: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서
오래된 입술 한 조각이 허공에 빠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 오지에서 길을 잃고 바깥이 그리 험한 줄 몰라,
입술 없는 입을 맞추며 겨울 해 기우는 내내
입술을 떠난 수천의 말들이 떠다니며
햇살 한 줌 없는 내 허공의 갈피를 샅샅이 뒤졌다
투명한 공중의 거미줄에
살얼음 같은 사랑이 떨고 있는 기척에
두 손으로 입술을 건져 볕으로 가고 싶어
한 시절 허공을 걸어서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는데
다 온 듯하면 아직도 남은 저 길 모퉁이
돌아가면 별이 반짝일까 그럴까,
-장금순, 「입술」, 《문학과 사람》(2021년 봄호)
우리는 사랑을 성경에서처럼 “언제나 오래 참고, 언제나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더 나아가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과연 인간에게 사랑은 그러한가. 시인은 오래된 사랑을 신체 일부인 ‘입술’에 비유하면서 ‘입술’이 ‘빠져’나가 ‘길을 잃고’ ‘떠다니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펼쳐 보여준다. 빌란트는 “현실 세계가 파괴되며 발밑이 아득해지는 듯한 충격과 섬뜩함,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당혹감”을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친근했던 것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야기하는 무서움을 주는 어떤 것”이라는 말로 그로테스크한 기법을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안전하다고 믿고 오르던 사다리의 발판 두, 세 개쯤을 과감하게 생략해 버림으로써 독자들의 발이 허공에 빠져버려 “현실 세계가 파괴되며 발밑이 아득해지는 듯한 충격과 섬뜩함,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당혹감”과 “오랫동안 친근했던 것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야기하는 무서움”을 조성한다.
이 시는 ‘입술 한 조각이 허공에 빠져 돌아오지 않았다’라는 환상적 괴기성을 바탕으로 첫 연을 시작하고 있다. 입술은 흔히 “입의 아래위에 도도록하게 붙은 얇고 부드러운 살”로 정의하지만 건강, 생명력을 가늠하는 동시에 “감각기관이 몰려 있어 신체의 다른 곳에 비해 민감한 곳 중 하나”이다. 입술은 “성대에서 나오는 음을 세밀하게 조절하는 기관으로 명료한 발음을 위해서는 정확한 입술 모양”도 중요하다.
‘입술’이 상실된 주체는 ‘입술 없는 입을 맞추’는 섬뜩한 현실에 놓여있다. ‘사랑’하는 대상과 교감을 나누는 감각기관이 상실되었으니 당연히 사랑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주체는 ‘겨울 해’ 기운 ‘햇살 한 줌 없는’ 차가운 상태로 변해 갔을 것이다. 차가운 주체의 대화 역시 서로에게 따뜻한 온기로 정착하는 것이 아닌 ‘수천의 말들이 떠다니’는 정말 쓸데없는 기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현실은 사랑의 믿음을 와해시켜 언제 헤어져도(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살얼음 같은 사랑’을 만들어 낸다. 그것도 거미줄에 걸린 채 떨고 있는 ‘살얼음 같은 사랑’이라니. 농담이라 하기에도 기괴한 이 우스꽝스러운 현실 속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빌란트가 이야기한 “현실 세계가 파괴되며 발밑이 아득해지는 듯한 충격과 섬뜩함,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당혹감”을 그대로 체험하게 된다.
작가는 망연자실 속에서도 ‘두 손으로 입술을 건져 볕으로 가고 싶어’ ‘돌아가면 별이 반짝일까 그럴까’라는 소망과 기대로 사랑의 실체를 포기하지 않은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성경을 깊게 읽어 본 사람은 사랑의 정의에 대한 시작과 끝이 믿음과 오래 참음에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 사랑은 언제나 강렬한 빛 속에서 ‘입을 맞추는’ 황홀한 시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사랑은 오래된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얻어 ‘반짝일까 그럴까’라는 기대와 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안전하리라 믿었던 사다리의 발판이 빠져버려 발이 빠지는 당혹감과 공포는 바로 오래된 사랑 안에 존재한다. 작가는 오래된 사랑에 대한 기존의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 파괴적 상상력으로 독자에게 충격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독자는 그 대답을 찾아 또 다른 사다리를 오르는 여행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사다리: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이른 봄 먼 여관에 몸을 부렸다
움트지 못한 나뭇가지가
지난겨울 날갯죽지처럼 웅크린 저녁
피는 꽃 위로 어둠이 포개지고
흐르는 물결 속으로 달빛이 스민다
모든 게 한 번에 일어나는 일 같지만
오랜 생을 나눠가진 지분들이 서로 허물을
가만히 덮어준다 경계를 지우며 살 섞는 시간
낯선 세상에 와 있다는 건
욕망의 한 부분을 드러내
무던히 참았던 육신을 들어내는 일
시시해 보이는 창가 의자에 앉아
허물을 격려하지 못해 멀어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잊어버린 주문처럼 쓸쓸한 이름
가끔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는
측은한 저녁이 올 테지
허물대신 온기 없는 낡은 침대와
살을 섞으며 시든 불화의 목록에서
견디지 못해 그어버린 경계를
그렇게 나마 지워 보는 것이다
-김명기, 「강변여관」, 《시와 경계》(2021년 봄호)
일상의 고민(물음)을 해결하거나 잊어버리지 못해 만성 스트레스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극약처방 중의 하나는 여행이다. 하지만 고민은 떠난다고 사라지거나 피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장 위대한 여행은 지구를 열 바퀴 도는 여행이 아니라 단 한 차례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라고 말한 마하트마 간디,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라던 마르쉘 푸르스트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여행은 고민을 잊어버리기 위한 망각활동이 아니라 해방 활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거나 오래된 물음에 해답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화자는 ‘이른 봄 먼 여관에 몸을 부렸다’라는 말로 여행자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가족들인 지인들과의 관광의 목적이 아니라 ‘출장’과 같은 업무적 목적으로 홀로 떠난 여행자로 보인다. ‘이른 봄’이라는 단어에 ‘움트지 못한 나뭇가지’ ‘지난겨울 날갯죽지처럼 웅크린 저녁’이라는 상황이 겹치면서 차가운 현실 안에 있는 화자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전해진다. 추운 공간을 피해 ‘먼 여관’을 찾아왔지만, 이곳에서 마주한 시선 역시 ‘피는 꽃 위로 어둠이 포개지는’ ‘웅크린 저녁’인 것이다.
화자는 여행을 통해 마주한 자신과의 조우를 ‘낯선 세상에 와 있다는 건/ 욕망의 한 부분을 드러내/ 무던히 참았던 육신을 들어내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사회생활이라는 명분 아래 ‘무던히 참았던’ ‘욕망의 한 부분’들이 여행지라는 ‘낯선 세상’ ‘달빛’ 아래에서 ‘시든 불화의 목록’으로 그 실체를 여실히 드러낸 순간을 보았던 경험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는 듯하다. 화자는 ‘불화’를 견디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결국 그 대상과 ‘경계’를 긋는 행동의 주체가 자신이었음을 ‘시시해 보이는 창가 의자에 앉아’ 자백한다. 사다리를 오르던 발길이 멈추는 지점은 ‘견디지 못해 그어버린 경계’에 대한 자백이 아니라 ‘가끔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는/ 측은한 저녁이 올’ 것이라는 고백 때문이다. ‘허물을 격려하지 못해 멀어진 사람들을’에 대한 화자의 자기 고백은 ‘허물’이 용납되지 않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대한 고백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아픈 고백이 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여행이라는 사다리를 통해 화자가 허물없이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오랜 생을 나누어 가진 지분들이 서로 허물을/가만히 덮어’ 주며 ‘경계를 지우는’ 위로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 한 계단 한 계단 발판을 오르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의지를 회복해 가는 과정은 문제의 해결을 떠나 문제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의 변화를 통해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고민이 생길 때마다 여행이라는 극약처방을 받아야 할까? 네 번째 사다리에서 그 물음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네 번째 사다리: 상실의 시대, 욕구를 끄다
아침마다 귓속에서
달팽이가 슬그머니 기어 나온다
화단으로 느릿느릿 마실 간다
듣기 싫은 것들을 듣지 않으려다 소리를 잃은 나는
눈으로라도 들어야 한다
바탕화면이 어둡다
밤을 박쥐가 날고 있다
타다닥! 자판을 두드리자
모니터에서 슈-욱, 내 귀로 찰싹 날아와 붙는다
박쥐는
저 멀리 있는 사연
소문보다 빠르게 들려주고
끼니가 되면
미식가나 찾을 먼 곳 요리도 손수 갖다 준다
보청기로도 듣지 못하는 소리
확성기로도 안 들리는 소리
진종일 먼 데 소리
빠른 소리만 듣다가
해가 지쳐 나도 지칠 때면
박쥐는 흐느적이 모니터에 스며든다
화면은 거꾸로 낮이 되고
박쥐도 거꾸로 매달려 잔다
‘스팟!’ 인터넷을 끈다
-김서영, 「귀」, 《월간문학》(2021년 3월호)
세계보건기구가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 증후군인 ‘번아웃 증후군’을 국제질병 표준분류기준에서 직업 관련 증상의 하나로 분류하였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정신적·신체적 피로로 인해 무기력해지는 증상으로 질병은 아니지만 ‘건강 상태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자’로 판단한 것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한국의 직장인 80% 이상이 ‘번아웃’을 경험하였고 그중 60% 이상은 ‘번아웃 증후군’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조사 결과다. 직장인들이 번아웃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당연히 인간관계로 상대방의 언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1위를 차지하였다는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김서영 시인의 ‘귀’라는 작품은 인간의 평형(균형)감각을 담당하는 전정기관과 청각을 담당하는 달팽이관이 있는 ‘귀’라는 신체를 통해서 혼란한 현실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번아웃 증후군’과 싸우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전달하고 있다.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되는 ‘소리(언어)’를 통해 현대인들 간의 소통에 대한 고발과 견디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상실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 화자는 “아침마다 귓속에서/ 달팽이가 슬그머니 기어 나온다”라는 진술을 통해 ‘달팽이’관을 통해 듣고 있는 말(소리)의 거부감을 드러낸다. 이러한 거부감은 비단 화자만의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거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라거나 ‘웃으라고 한 말에 초상난다’라는 우스운 농담에 더 공감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듣기 싫은 것들을 듣지 않으려다 소리를 잃은” 화자는 주변인들에 소리를 담아 두기보다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밖에 없는 현실적 선택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다 소리를 잃어버린 듯하다. 하지만 ‘눈으로라도 들어야 한다’는 구절을 통해 듣고 싶지 않은 자아와 듣지 못해 소외되고 싶지 않은 자아가 충돌하는 시점에서 ‘박쥐’라는 생명체를 발견해 낸다.
포유류이지만 스스로 날 수 있는 종류는 박쥐뿐이다. 날아다니지만 새가 아니라는 이유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야비한 동물의 대명사인 박쥐는 사회조직원들에게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움직이는 기회주의자의 대명사로 쓰인다.
작가는 박쥐를 기회주의자의 상징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노력하는 대상으로 보인다. 박쥐라는 이름의 기원은 본래 ‘밝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야행성인 박쥐는 어두운 밤에도 잘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눈이 밝은 쥐’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발달한 것이 아니라 ‘초음파’가 발달한 것이다. 박쥐는 어둠 속에서도 초음파를 통해 먹이의 거리, 속도, 질감을 구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매일 밤 수많은 해로운 곤충을 잡아먹고 중요한 농작물을 수분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능을 가진 박쥐는 실제로 ‘멀리 있는 사연’을 ‘소문보다 빠르게 들려주고’ ‘끼니가 되면/ 미식가나 찾을 먼 곳 요리도 손수 갖다’ 주는 주체가 된다. 초음파가 아닌 전파의 역할을 통해 통신의 주제가 되는 박쥐의 모습은 어쩌면 온라인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인간의 가상 이상적인 모습의 대상화인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인들의 일상이 ‘자판’과 ‘모니터’로 상징되는 온라인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보청기로도 듣지 못하는 소리/ 확성기로도 안 들리는 소리/ 진종일 먼 데 소리/ 빠른 소리”를 ‘눈으로라도 들’으며 지쳐간다는 작가의 걱정 어린 시선은 곧 우리의 현실에 대한 걱정이면서 동시에 밤낮으로 소리(소통)를 강요받는 현실 인식이다. 이러한 현실은 쉬어야 하는 밤에도 ‘거꾸로 낮이되’는 야행성을 만들어 낸다. 쉴 수 없는 사람들은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잠들 수밖에 없다. 화자는 단호하게 ‘인터넷을 끈다’라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 한참 남아있는 계단을 생각하며 오르던 계단 위로 갑자기 생겨난 문이라니. 허공에 매달려 살아가던 독자를 바로 세우고 넓고 튼튼한 발판을 제공하는 시인의 놀라운 선택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다섯 번째 사다리: 내 안에 외치는 평화적 목소리
바람 앞에 무릎 세운
연골 하나로
어둠의 부피를 재네
꺼질 듯, 타오르는
심지 하나로
어둠의 둘레를 재네
어둠에서 어둠으로 이어지는
눈빛 하나로
어둠의 길이를 재네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가장 원초적인 생각으로
긴 문장 쓰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몸짓으로
어둠을 새로이 쓰네
이름과 얼굴을
따로 두지 않는 선지자네
참과 거짓을
왜곡하지 않는 역사가네
너의 두 눈은
광장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평화롭고
골목길을 에워싼 싸락눈처럼
때때로 한 방향을 바라보네
너의 눈물은
할 이야기가 많은 무덤이네
너는 오직
글썽이는 눈물 하나로
흘러내리면서 쌓이는
너만의 방식으로
무덤의 내벽을 다시 세우네
너의 심지는
숫잠 든 살을 녹이며
여윈 잠자는 살을 태우네
단단한 심지는
꺼지지 않는 너의 내부에서
만들어지네
-강영은, 「촛불」, 《시현실》(2021년 봄호)
전등을 끄고 촛불을 켜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불꽃이 주는 몽환적 느낌을 기억할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촛불을 바라보는 사람은 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촛불을 바라보며 깊은 명상에 잠기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사유하면서 꿈꾸고 꿈꾸면서 사유하던 시절, 촛불은 영혼의 고요를 재는 압력계일 수 있었고, 결이 고운 평온,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내려가는 평온의 척도”였음을 강조하며 평온해지고 싶다면 “빛의 작업을 수행하는 가벼운 불꽃 앞에서 가만히 숨 쉬어보라”고 권유하기도 한다. 작가는 바슐라르의 목소리를 들은 듯 「촛불」을 통해 불꽃 앞에서 숨 쉬는 체험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인이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빛’과 ‘어둠’의 실체이다. 니체는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라는 말로 빛의 깊이를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시인의 시선을 따라 촛불을 마주하면서 빛의 깊이를 바라보게 된다. 빛의 깊이를 가늠하게 하는 척도는 ‘어둠’이기에 촛불은 어둠의 ‘부피’, ‘둘레’, ‘길이’를 재는 과학적 상상력의 주체가 된다. 과학적 상상력은 어둠을 기록한다. 기록이 쌓이면 무엇이 될까. 시인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가장 원초적인 생각으로/ 긴 문장’을 쓰는 것으로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다. 이러한 행위는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든 후에 ‘어둠’을 인식하고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만들어진 것과 부처가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자기 자신을 비추는 빛”이 되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어둠을 새로 쓰’는 역사적, 종교적 상상력으로 확대된다.
촛불은 과학적이며 문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종교적인 상관물로서 ‘이름과 얼굴을/ 따로 두지 않는 선지자’로 ‘참과 거짓을/ 왜곡하지 않는 역사가’로 독자와 마주하면서 독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둠을 발견하고 자각함으로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빛이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광장에 내리는 함박눈’ 같은 ‘때때로 한 방향을 바라보는’ ‘ 평화’로운 ‘두 눈’을 갖는 것이다. ‘평화’로운 두 눈은 ‘이야기가 많은 무덤’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마음이며 동시에 ‘흘러내리면서 쌓이는’ ‘무덤의 내벽을 다시 세우’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을 녹이며’ ‘살을 태우’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 결단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단단’해진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촛불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것이리라.
작가는 진실하고 신비한 촛불의 힘을 통해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에 대한 시선을 어둠에 잠시 가리고 ‘선지자’와 ‘역사가’가 될 수 있는 내부의 힘을 기르는 고요한 몰입의 시간을 독자들에게 청하고 있다.
시를 통해 작가와 독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문은 반드시 활짝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그 문을 찾기 위해 시인이 만든 사다리를 오르며 사다리 사이의 심연처럼 드러나는 깊이를 느끼는 과정은 매우 신비롭다. “독자는 문화적 발화發話를 통해 시인의 세계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적극적인 오름의 과정을 예술의 완성에 대한 주요한 역할로 보고 있는 것이리라.
오늘도 촘촘하고 특별한 사다리를 고민하는 시인을 위하여, 허공에 사다리를 걸어 두고 독자들을 기다리는 시인을 위하여, 그리고 그 발판을 오를 준비를 마치거나 오르고 있는 독자를 위하여, 건배를 청하고 싶다. 두드려라! 예술을 완성하는 관계의 화룡점정. 그 순간이 그대에게 펼쳐지기를 기대하면서.
한기욱 대전 출생. 2003년 《시문학》 등단. 현재 대전대학교 H-LAC 출강.
시와 경계 2021년 여름호 ‘지난 계절의 시 읽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