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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文學論}

강인한의 「바다의 악보」감상 / 권혁웅

이양덕 2011. 9. 29. 20:51

강인한의 「바다의 악보」감상 / 권혁웅

 

 

바다의 악보

—벤 구센스의 'Sweet songs of the sea'에 부쳐

 

  강인한

 

 

바다가 저만치 물러나자

썰물이 뱉어놓은 모래밭에 악보가 드러났다

당신의 입술은 동그랗게 모음을 발음하다가

그만 악보 받침대에 갇혀 나를 바라본다

 

오, 달콤한 붉은 입술은 적포도주를 담은 글라스

아니 두 장의 장미 꽃잎 같다

하지만 오래 전 당신은 이 해변을 떠났다

 

저만치 과거로부터 떠밀려온 트렁크에는

자물쇠가 채워졌고 두근거리며

들키고 싶은 당신의 사랑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두려운 비밀을 향해 걸어가는 내 발자국마다

한 장 두 장 물 젖은 악보가 따라오고

입 벌린 소라고둥이 트렁크 위에 앉아 소리친다

이제 곧 태풍이 불어온다고 내 마음 속

잠자는 태풍이

검은 수평선을 끌어낼 것이라고

 

그리운 당신의 기억을

이 해변에 떠도는 세이렌의 노래로 남겨두고서는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돌아갈 곳이 없다

 

 

————

* 벤 구센스(Ben Goossens) :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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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름에 관해 생각한다. 흘러간다는 것. 생기의 잇닿음. 그것은 모든 것을 과거지사로 만들어버리는 시간의 움직임 혹은 모든 것을 분절하고 반복하여 노래로 만드는 기억술이기도 하다. 썰물이 모래밭에 새겨 넣은 무늬도 바로 그럴 것이다. 악보가 아닐 수는 없을 것이다. 김명인 시인이 채석강에서 “바다의 아코디언”을 본 적이 있었거니와, 강인한 시인은 거기서 악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악보에 따라 동그랗게 입을 모은 당신의 입술도.

 

   당신의 입술은 떨어져 내린 두 장의 꽃잎 같았다. 물론 당신은 떠났고 꽃은 졌다. 당신과의 추억은 옛일이 되었다. 바닷가를 떠도는 저 트렁크가 완강하게 다문 입처럼. 그 안에 숨은 두근거림처럼. 그런데 내가 모래밭을 거닐자 음표들이 생겨난다. 빠르게 걸으면 빠른 노래가, 천천히 걸으면 느린 노래가 젖은 악보에 적힌다. 당신이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을까? 마음속 노래가 절정에 이를 수 있을까? “잠자는 태풍”이 “검은 수평선”을 끌어낼 수 있을까?

 

   수평선을 토막토막 끊어내는 오징어잡이 배들의 그 집어등처럼 내 기억은 당신이라는 고요한 중심의 주변을 맹렬하게 떠돈다. 모든 노래가 다 그리로 휩쓸려든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나는 옛일 위를 떠도는 하릴없는 해변의 산책자. 당신의 노래를 “세이렌”의 그것으로 남겨두고 나는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 돌아갈 곳 없을지라도, 내 노래는 끝내 저 밀려오고 밀려오는 수평선에 지워져 최초의 악보로 돌아갈 것이다.

 

   흐름에 관해 생각한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저 악보 혹은 유전(流轉)에 관해서.

 

 

권혁웅 (시인)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1년 9-10월호, 테마로 읽는 현대시 _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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