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이만섭시인서재} (867)
이양덕의 詩 文學
배꽃 감정 이만섭 유난히 맑은 햇빛 속으로 저만치에 봄 소녀들 지나가네. 결백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봄 동산으로 소풍가는 중일까, 옥수수 같은 흰 이를 살짝살짝 드러내 보이며 소녀들은 막 움돋는 봄풀 곁에서 해찰 아닌 해찰을 하며 서로 비밀 하나씩 돌아가면서 고백하네. 귀 기울일 수 없는 거리이지만 거울에 비추어보듯 비밀은 꽃처럼 피어나네. 개펄이 진홁 속에 숨긴 조개의 흰 속살을 하얀 소금 뿌려 불러내는 어부만의 이야기 같은 열일곱 일기장에 간직한 소녀들의 여리고 부푼 가슴이 지닌 말, 누가 봄볕에 꺼낼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운 손길로 또박또박 적어놓은 문장 헤아려보니 다정하고 오롯한 진실의 테두리 안에 꽃은 하얗게 피어 있다.
진화하는 사물 (외 1 편) 이만섭 지우개를 사용하기 전 종이는 바닥에 등을 밀착시켜 표면을 정리한다. 경작지를 갈아엎듯 해일처럼 밀려오는 지우개의 출현에 명암이 분명한 글자들이 말끔히 지워지며 평면이 창백해진다. 생각이 차분할수록 빠르게 정돈되는 사물의 구체성 보는 그대로 이전의 상태와 구분되어 있다. 문장이 지워졌으니 의미도 상실하고 불변처럼 제 위치에 있던 것이 생각에 이끌린 것이다. 변화를 꿈꾼 나머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멀쩡한 물체를 이어 붙인다거나 멀쩡한 물체가 분질러진다거나 공간을 이동해 와 이해를 진작시키는 전람회의 그림 같은 사물은 도처에 자리한다. 진화는 영점에서 이행되는 것 지우개가 엄지와 검지의 수행자가 되기까지 그 자체만으로 옳았던 사물인데 부조리를 발견한 생각에 편승하여 불변이..
오리가 있는 풍경 이만섭 풍경이 오리가족을 몰고간다. 뒤뚱거리는 엉덩이를 따라가는 방천길은 억새의 긴 모가지가 굽어보는 물가에 당도하여 첨벙, 오리를 물에 들여놓고 뒤돌아선다. 한걸음 더 자율성을 확보한 듯 꽥꽥, 부드러운 손으로 오리엉덩이를 받쳐 든 수면은 물이랑을 일으키며 만재흘수선의 채위를 반기는 것이다. 접힌 날개는 공중만을 사용하는 몫인 듯 마름모꼴의 몸을 슬슬 밀어가며 수심을 더듬어 끌어올린 그물망에 재빠르게 물고기의 살점을 발라내는 즐거운 부리 영점의 저울눈에 무게를 실어 나르는 행동반경을 풍경은 단순히 원근법으로 다루고 있다. 지루해하지 않고 나태해하지 않는 습관의 맨 앞줄에서 바람의 격발소리가 울려 퍼지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궤도를 차고나가는 오리가족 날개는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이슬과 사귀다 이만섭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낯을 비추이며 속삭였지 신비와 순수를 가득 채워 찬란의 깃발을 드높이며 한 방울의 물로도 집을 짓고 한 방울의 물로도 얼굴을 꾸미는 변신에 대하여 눈빛을 나누었지 이 아침은 맑아서 좋아라 풀잎들은 싱그러워서 좋아라 우리의 대화가 어느 틈에 메아리처럼 울려퍼져 햇살을 불러오고 뭇 생명들 맨 앞에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지 보이지 않는 사랑이 초록이 열리기 전 연두의 자태처럼 영롱함으로 들어앉아 있었지
아무 일 없는 하루에 대한 慰勞 이만섭 화살로 퍼붓는 날빛 빛살을 피하느라 하루 해 정신없이 넘겨먹고 저녁과 더불어 깨어나 휴! 하고 이제 살았구나, 할 때 슬그머니 비애가 끼어든다. 심신을 소신한 뒤끝에 돌아보는 하룻길은 일상이라는 채무에 시달린 것이다. 그마져 주마가편으로 질주한 경계점이 영점이라도 되는 듯 허물로 색인되는 오늘은 어제의 닮은꼴 빗물이 주룩주룩 퍼붓는 날도 하루 해 넘겨먹기는 매한가지 날짜를 공치면서도 제 구석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해 온갖 고백을 마음에 바치고 끝내 빗장을 거는 것이다. 토굴속의 토끼처럼 제 새끼가 몇 마리인지 분간 못해 세고 또 세다가 숫자를 놓치고 습습하게 넘겨먹는 하룻길 또한 어제와 닮은꼴 어떤 자에게 생일을 물었다. 숫자를 모르는 그가 기억해낸 끝에 수수깡 엮어..
꽃 보러 갔다 이만섭 투명한 심지를 밝히는 봄빛 조명 아래 입김처럼 후! 하고 내민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얼굴은 이천 새의 눈동자로 나를 맞이한다. 나무는 보이지 않고 꽃들만 낯익은 듯 낯선 듯 맨몸인 채 맨살인 채 아슬아슬한 난간에서 숭어리째 색을 펼쳐놓고 가쁜 숨결로 허공을 붙들고 있었다. 서로 눈길 오가다가 선물처럼 건네주는 아름다움을 받들고 있는데 이천 개의 눈동자 가운데 잽싸게 낚아채는 눈총의 날개 부딪는 표정으로 파닥거려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인데 꽃들의 한 복판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표정은 일제히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그게 아니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열정 같은 무기를 품에서 꺼내 잘 벼린 검의 낯처럼 번뜩하고 햇빛에 드러내 보이며 꽃잎끼리 부딪쳐 분분히 발산하는데 꽃차례는 ..
날짜를 짚다 이만섭 일월의 바큇살은 투명해서 굴러가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싣고 있지 요철자국 없는 수레바퀴이건만 나날을 더해 계절을 맞이하고 나이를 헤아린다. 누군가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딱 기억하기 좋은 새날을 기다리다가 오늘을 잊고 약속을 어긴 어제는 얼마나 많은가, 생활이란 끊임없는 명분의 놀이터 오늘의 생각을 추스르다 들여다 본 달력에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 붉은 열매로 익은 공유일의 숫자를 물고 허공으로 날아가버린다. 계산된 날짜에서 멀뚱이 하루를 놓치고 허탈함에 투정을 부리는데 손가락으로 꾹 눌러 달력에 주저앉힌 숫자가 이월에 속은 패일까, ⸺반년간 《상상인》 2021년 1월, 창간호
냉이꽃 이만섭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사랑이어요. 수줍어 차마 말 못하는 사랑이어요. 맑은 햇살이 품어놓은 한뼘 가슴에 꽃샘도 몰래 살짝 피어난 사랑이어요. 봄 어귀에 나풀대는 바람 사분히 주저앉혀 받두렁에서 나물 캐던 먼 옛적 열여섯 누님 같은 꽃이어요.
그립다는 말의 풍경을 적다 이만섭 기린의 긴 목이 가시나무 우둠지 사이로 솟아 초원을 바라본다. 푸른 숲으로 에워싸인 산봉우리처럼 갈기를 타고 올라 단단하게 박힌 뿔 눈매가 향한 곳은 이곳이 아닌 저곳, 천지간 너머 아득한 곳 바람이 불지 않아도 펄럭이는 깃발로 어떤 손짓이 속울음을 달래듯 다가오다가 멀어지고 다가오다가 멀어지며 초원은 해원이 되었다가 해원은 창천이 되었다가 창천은 날빛을 쏘아 올려 하늘호수의 심연에 지느러미 길게 드리우고 유영하는 푸른 물고기 떼 들여다보는 해종일 끝없이 이어지는 길 없는 길에 날이 저문다. 기린의 거망빛 눈시울이 저물녘의 평원으로 점멸등 깜박이듯 흐려지는 정경을 찻물 우려내듯 향마져 곁에 두고 싶은데 아니 보이는 것이 꽃이 되고 새가 되는 것을 이렇듯 혼자서 가질 수 ..
표정을 베끼다 이만섭 입술을 다문 말을 옮겨 적는다. 손 끝으로 읽는 점자처럼 얼굴을 더듬어가며 느낌을 필사한다. 다 적어내지 못한 나머지를 따라 읖조리다가 물끄러미 치어다 보는데 그가 기분을 끌어안고 중얼대는 것이다. 설핏 아닌가 싶어 필사의 촉이 놓친 것을 곰곰히 헤아리다가 초상화에 담아내는 전신사조라는 말이 떠올라 거울과 거울 사이를 갈마들며 과묵한 얼굴을 해석하듯 유심히 살피는데 알 수 없는 부탁이 색채감으로 도드라진다. 가슴을 드러내고 싶을 때 얼굴이 먼저 붉어진다는 것을 그가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