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덕의 詩 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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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의「검은 브래지어」평설 / 박남희
검은 브래지어
김혜순
아주아주 심심한 날
나는 입술을 가슴에 파묻은 물새처럼
검은 안대 속 뻔히 두 눈 뜨고 있는
내 가슴 맛을 보려 한 적이 있어요
내 가슴에선 아마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등대 맛이 날지도 몰라요
아니면 그 섬의 감옥, 독방의 맛!
아니면 지하 카타콤 맛이거나
그건 내 입속 침샘에 잠긴 돌기들의 문제지
내 가슴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요
누구든 가슴에 달린 제 눈알의 맛을 음미할 순 없죠
내 가슴은 안대를 벗고 바라봐요
(꽁꽁 묶어뒀던 폭포가 터지듯)
(포장지를 벗겨낸 바다가 출렁하듯)
(내 몸이 내 눈동자를 방생하는 기분이 들게 그렇게)
(바닷가 언덕에서 모이 찾고 있는 물새 병아리 두 마리처럼)
물속에 누워
왼쪽 가슴과 오른쪽 가슴 사이로
익사한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그런
고래 같은 기분으로!
언젠가 수백 명의 어머니들이 광장에서
아들의 유해를 기다리는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나는 그때 그 어머니들의 등에 달린
후크를 다 빼드리고 싶었다니까요
가슴에 달린 눈들이 흑흑
울음소리 광장을 메아리 쳤거든요
제발 나를 혼자 두고 가지 마
나는 엄마야
이리이리 헤엄쳐 와 내 바다로 와
안대 속에서 퉁퉁 부은 눈동자들이
감옥의 벽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
안대는 마치 누군가의 두 손처럼 생겼어요
병아리 두 마리를 꽉 틀어쥔 검은 장갑 낀 손!
그물에 걸린 물고기더러 회개하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길 잃은 병아리더러 회개하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내 검은 브래지어 끈이
두 눈이 흘린 눈물줄기처럼
축 늘어져 있네요
(바다 한가운데서 검은 안대를 하고 노 젓는 사람처럼
나는 지금 깊은 곳 아무 데나 노 저어 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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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있어서 가슴은 여성성과 모성성을 대표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가슴이 여성성과 만날 때 여성의 아름다움이나 육체적 욕망과 결부되고, 모성성과 만날 때는 자식을 향한 가없는 희생과 사랑을 상징하는 기표가 되기도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이 ‘검은 브래지어’를 ‘안대’로, ‘젖꼭지’를 ‘눈’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여성의 가슴이 신체부위 중에서 눈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과는 달리 가슴으로도 세상을 본다. 그것은 여성에게는 잠자리의 눈과 같은 겹눈이 가슴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가진 엄마가 아이 생각만 해도 가슴에서 젖이 흘러나오는 것은 아이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는 것과 동일한 생리현상이다. 우리는 눈물이 날 때 눈물이 핑 돈다고 하고 젖이 흘러나오는 것도 젖이 돈다고 말한다. 이처럼 여성에게 있어서 가슴은 제2의 눈이다.
1연에서 시인이 검은 브래지어에 숨겨진 가슴의 맛을 보려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신의 가슴 속에 숨겨진 여성성과 모성성을 새롭게 일깨우려는 일종의 자아찾기 방식이다. 2연에서 시인이 자신의 젖 맛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등대 맛”이라든가, “그 섬의 감옥, 독방의 맛”, “지하 카타콤 맛”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가슴’으로 상징되는 여성성과 모성성이 그동안 억압되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제목인 ‘검은 브래지어’도 억압의 상징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여성의 억압을 감각을 통해서 해소하려고 한다. “그건 내 입속 침샘에 잠긴 돌기들의 문제지/ 내 가슴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요”라는 시인의 독백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감각’에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하지만 시인이 자신의 혀로 가슴 맛을 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시인은 드디어 안대를 벗듯 검은 브래지어를 벗고 가슴으로 하여금 캄캄했던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시인은 검은 브래지어로부터 해방된 가슴 눈이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느낌을 “ (꽁꽁 묶어뒀던 폭포가 터지듯)// (포장지를 벗겨낸 바다가 출렁하듯)// (내 몸이 내 눈동자를 방생하는 기분이 들게 그렇게)// (바닷가 언덕에서 모이 찾고 있는 물새 병아리 두 마리처럼)” 자유롭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이러한 기분을 괄호에 묶어둔 것은 여성의 자유가 아직은 괄호 속의 자유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으로서의 시인에게는 아직 “물속에 누워/왼쪽 가슴과 오른쪽 가슴 사이로/ 익사한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그런/ 고래 같은 기분”, 즉 극히 수동적인 기분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이 수백 명의 어머니들이 광장에서 아들의 유해를 기다리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나는 그때 그 어머니들의 등에 달린/ 후크를 다 빼드리고 싶었다니까요/ 가슴에 달린 눈들이 흑흑/ 울음소리 광장을 메아리 쳤거든요”라고 말하는 것도 답답해서 울고 있는 모성적 가슴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이 시의 말미에서 시인이 브래지어를 “ 병아리 두 마리를 꽉 틀어쥔 검은 장갑 낀 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엄청난 힘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폭력에 대한 고발의 의미가 담겨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여성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이며 “길 잃은 병아리”이므로 남성권력의 도덕적 억압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바다 한가운데서 검은 안대를 하고 노 젓는 사람처럼/ 나는 지금 깊은 곳 아무 데나 노 저어 가고 싶네요)”라고 하여 여성이 끝끝내 ‘검은 안대’, 즉 남성의 억압으로부터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전형적인 페미니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는 과격한 페미니즘 시라기 보다는 여성성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이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온건한 페미니즘 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박남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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