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덕의 詩 文學

악기들 2 외 본문

※{이만섭시인서재}

악기들 2 외

이양덕 2009. 7. 18. 14:19

 

 

 

악기들 2 -빗소리

 

 이만섭

 

 

 

주룩주룩-
하염없이 질주해오는 빗소리에 젖는다

창 밖, 거대한 습지에
천 마리의 되새떼가 날아와 교대로 물을 먹는다
주르륵 쩝쩝- 주르륵 쩝쩝-
저 소리 엿듣는 마당 가 감나무
잎사귀마다 귀 열고
새떼들이 부리 다시는 소리 헤아리다가
빗물 먹은 뿌리가 먼저 포만감에 겨운지

슬슬 눈빛이 풀리고,
새떼들이 날아오기 이전 저 수직의 비바체들은

독재자가 지휘하는 오페라 같은 
한 덩이 음울한 원형질이었다
이제 첼로처럼 가슴 아래서 현을 켜는
구슬픈 속앓이는 끝내야지
어차피 강물로 흐를 테니

 

 

 

 

 

 

 

꽃잠  /이만섭

 

 

 

세상은 무심하다
모두가 자화자찬 일색이더니
저녁은 저마다 다르게 찾아드는구나
저이도 가슴에 늪 하나 들여놓고
깊이로 유영해 간 것일까
바람은 꽃나무 우듬지에서 한들거리는데
고단한 생을 끌고 온 수고로운 발
제 몸에 기대어 쉬게 하고
한세상 까맣게 잊었다
물길 내갈 수 없는 늪의 수심은
저리도 혼곤하구나
저 죽음보다 깊은 잠을
흔들어 깨울 자 누구인가

  

 


 

 

 

 

여름 바다  /이만섭

 

 

 

여름날이면 바다가 일러준 말이 그립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더욱
애틋해지는 그 말,

그대는 푸른 추억을 새김질하다가
내가 미치도록 그리우면 찬물이라도 벌컥벌컥 퍼마시며
가슴에 이는 신열을 식혀내라고,

그래도 짙푸른 물굽이로 달려오면
그때는 별 수 없이 예전에 내게서 가져간 그리움 움켜쥐고
훨훨 새처럼 날아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바다여,
내 가슴에서 팔닥팔닥 뒤척이는 파도여,

 

 

  

 

 

 

 

경계선 밖에서 /이만섭

 

 

여태껏 내가 서 있던 자리가 난간이었구나
그곳이 바람의 행간이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어쩌면 나는 한 발 앞에
발을 헛디디고 다닌 지도 모른다
비구름을 따라가다가 물이 모이는 강어귀에 이르면
까닭없는 무정부주의에 빠져들었다
그 난간에서
먹구름층 사이로 쏟아지는 비를 맞은 적이 있다
포화처럼 막무가내 퍼부어오는데
그때 비는 하나의 정체성이었다
사물을 세우고, 나를 세우고,
소나기는 피해야 한다, 라는 경구도 무시하고
내 몸속으로 끌고 온 비는
더는 가눌 길 없는 비트 제네레이션이 되었다
신작로와 벌판 같은,
운동장과 허공 같은,
이를테면 나는 나를 암암리에 비워내고 있었다
그 난간에서 본 것이 있다
허공을 날아와 젖은 나무 등걸을 타고 앉은 푸른 동고비
새는 날 때만 새가 되듯이
모든 속성은 경계선 밖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하연(夏蓮) /이만섭

 

 

기축년 윤오월 스무 이튿날 바람 쐬러 나왔다가

새미원 연밭에서 연풍이 귀밑 스치는 소릴 들었네
밤새 흐르던 강물이 놓고 갔던지

물의 사연 꽃으로 피어달라는 듯

꽃들은 초록 치마를 입고 사뿐사뿐 걸어나와
곱다랗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 있었네

 

 

  

 

 

 

순풍 /이만섭

 

  

텅 빈 집이 종이배처럼 가벼운 날이다

 

아내는 동창회에 가고

아이는 도서관에 가고

어머니도 노인정에 가셨다

 

혼자 있는 집

나도, 있는 듯 없는 듯

거실에 누워 가만히 창밖을 보니

맑은 하늘 가에 떠있는 흰 구름 한 점

 

높새 타고 올랐나

 

 

 

 

 

 

무심을 여쭈다

 

 이만섭

 

 

 

며칠 만에 나간 앞 냇가
장맛비에 씻겨 물살만 거칠다
해질 무렵 산책길을 나서면
무리지어 뛰어놀던 피라미떼들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어떤 놈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어떤 놈은 흐르는 물살 위에서
파르르 파르르 은날개 펼쳐보이더니
어디로 갔는지 감감무소식이다
길 언덕의 갈대숲에서도
저희끼리 살갑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개개비들도
어디로 떠났는지 자취 묘연하다
아무리 하찮은 것들일지언정
일상에서 친숙해진 것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넌지시 깃드는 삭막감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내가 무심하지 않았는지
마음에 여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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