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기들 2 -빗소리
이만섭
주룩주룩- 하염없이 질주해오는 빗소리에 젖는다 창 밖, 거대한 습지에 천 마리의 되새떼가 날아와 교대로 물을 먹는다 주르륵 쩝쩝- 주르륵 쩝쩝- 저 소리 엿듣는 마당 가 감나무 잎사귀마다 귀 열고 새떼들이 부리 다시는 소리 헤아리다가 빗물 먹은 뿌리가 먼저 포만감에 겨운지
슬슬 눈빛이 풀리고, 새떼들이 날아오기 이전 저 수직의 비바체들은
독재자가 지휘하는 오페라 같은 한 덩이 음울한 원형질이었다 이제 첼로처럼 가슴 아래서 현을 켜는 구슬픈 속앓이는 끝내야지 어차피 강물로 흐를 테니

꽃잠 /이만섭
세상은 무심하다 모두가 자화자찬 일색이더니 저녁은 저마다 다르게 찾아드는구나 저이도 가슴에 늪 하나 들여놓고 깊이로 유영해 간 것일까 바람은 꽃나무 우듬지에서 한들거리는데 고단한 생을 끌고 온 수고로운 발 제 몸에 기대어 쉬게 하고 한세상 까맣게 잊었다 물길 내갈 수 없는 늪의 수심은 저리도 혼곤하구나 저 죽음보다 깊은 잠을 흔들어 깨울 자 누구인가

여름 바다 /이만섭
여름날이면 바다가 일러준 말이 그립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더욱 애틋해지는 그 말,
그대는 푸른 추억을 새김질하다가 내가 미치도록 그리우면 찬물이라도 벌컥벌컥 퍼마시며 가슴에 이는 신열을 식혀내라고,
그래도 짙푸른 물굽이로 달려오면 그때는 별 수 없이 예전에 내게서 가져간 그리움 움켜쥐고 훨훨 새처럼 날아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바다여, 내 가슴에서 팔닥팔닥 뒤척이는 파도여,

경계선 밖에서 /이만섭
여태껏 내가 서 있던 자리가 난간이었구나 그곳이 바람의 행간이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어쩌면 나는 한 발 앞에 발을 헛디디고 다닌 지도 모른다 비구름을 따라가다가 물이 모이는 강어귀에 이르면 까닭없는 무정부주의에 빠져들었다 그 난간에서 먹구름층 사이로 쏟아지는 비를 맞은 적이 있다 포화처럼 막무가내 퍼부어오는데 그때 비는 하나의 정체성이었다 사물을 세우고, 나를 세우고, 소나기는 피해야 한다, 라는 경구도 무시하고 내 몸속으로 끌고 온 비는 더는 가눌 길 없는 비트 제네레이션이 되었다 신작로와 벌판 같은, 운동장과 허공 같은, 이를테면 나는 나를 암암리에 비워내고 있었다 그 난간에서 본 것이 있다 허공을 날아와 젖은 나무 등걸을 타고 앉은 푸른 동고비 새는 날 때만 새가 되듯이 모든 속성은 경계선 밖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하연(夏蓮) /이만섭
기축년 윤오월 스무 이튿날 바람 쐬러 나왔다가
새미원 연밭에서 연풍이 귀밑 스치는 소릴 들었네 밤새 흐르던 강물이 놓고 갔던지
물의 사연 꽃으로 피어달라는 듯
꽃들은 초록 치마를 입고 사뿐사뿐 걸어나와 곱다랗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 있었네

순풍 /이만섭
텅 빈 집이 종이배처럼 가벼운 날이다
아내는 동창회에 가고
아이는 도서관에 가고
어머니도 노인정에 가셨다
혼자 있는 집
나도, 있는 듯 없는 듯
거실에 누워 가만히 창밖을 보니
맑은 하늘 가에 떠있는 흰 구름 한 점
높새 타고 올랐나

무심을 여쭈다
이만섭
며칠 만에 나간 앞 냇가 장맛비에 씻겨 물살만 거칠다 해질 무렵 산책길을 나서면 무리지어 뛰어놀던 피라미떼들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어떤 놈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어떤 놈은 흐르는 물살 위에서 파르르 파르르 은날개 펼쳐보이더니 어디로 갔는지 감감무소식이다 길 언덕의 갈대숲에서도 저희끼리 살갑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개개비들도 어디로 떠났는지 자취 묘연하다 아무리 하찮은 것들일지언정 일상에서 친숙해진 것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넌지시 깃드는 삭막감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내가 무심하지 않았는지 마음에 여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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