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덕의 詩 文學

진화하는 사물 (외 1 편)-이만섭 본문

※{이만섭시인서재}

진화하는 사물 (외 1 편)-이만섭

이양덕 2021. 11. 8. 14:07

 

진화하는 사물 (외 1 편)

 

                       이만섭

 

 

 

지우개를 사용하기 전 종이는

바닥에 등을 밀착시켜 표면을 정리한다.

경작지를 갈아엎듯 해일처럼 밀려오는

지우개의 출현에 명암이 분명한 글자들이

말끔히 지워지며 평면이 창백해진다.

생각이 차분할수록 빠르게 정돈되는 사물의 구체성

보는 그대로 이전의 상태와 구분되어 있다.

문장이 지워졌으니 의미도 상실하고

불변처럼 제 위치에 있던 것이 생각에 이끌린 것이다.

변화를 꿈꾼 나머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멀쩡한 물체를 이어 붙인다거나

멀쩡한 물체가 분질러진다거나

공간을 이동해 와 이해를 진작시키는 

전람회의 그림 같은 사물은 도처에 자리한다.

진화는 영점에서 이행되는 것

지우개가 엄지와 검지의 수행자가 되기까지

그 자체만으로 옳았던 사물인데

부조리를 발견한 생각에 편승하여

불변이라는 바탕의 고정관념을 벗고

형체를 정돈하여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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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뜰

 

 

 

갈맷빛 무르익어 떠난 자리

 

백방으로 흩어진 여름의 잔해들 틈새에서

 

창궐하는 쓸쓸함을 감내하는 듯싶더니

 

잰걸음으로 건들마를 쫓는 마른 잎

 

무슨 볼일이 있기에 서쪽으로 서쪽으로만

 

쇠잔한 기력을 다하여 궁색한 자취 애써 지워가며

 

소멸하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공터에 저녁빗살 불러들여

 

나무 그림자 경계병처럼 기다랗게 세워놓고

 

지평을 기다리듯

 

저리도 할 일이 남아 있는 가을 뜰

 

이만섭 / 1954년 전북 고창 출생. 2010년 〈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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