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덕의 詩 文學

허영자論 -직관을 통通한 극기의 변주 /이만섭 본문

※{詩♡♡♡文學論}

허영자論 -직관을 통通한 극기의 변주 /이만섭

이양덕 2015. 1. 31. 16:39

                                   



허영자論  

 

-직관을 통通한 극기의 변주

 

 

       이만섭

 

 

 

   시적詩的이란 말은 시와 별개의 뜻으로 대상에 대한 고양된 느낌을 드러내는 감상자적 표현이다. 한 구절의 문장이나 한 편의 회화, 그밖에 스치는 풍경이나 심지어 너와 나의 대화중에도 한순간 서정적 감각을 드러내는 느낌표로서의 말이다. 고착된 인식을 해방시키고 새롭게 부여되는 말의 의미처럼 상징을 지녔기에 이쯤에서는 복잡 미묘한 것도 좀 더 단순해져 시 밖에서 시의 기척을 알아차리는 의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왕의 시에 이처럼 시적이란 말을 상정한다면 적절치 않은 표현임에도 필자는 허영자 시인의 시를 시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시가 시적이지 않고 시가 될 수 없겠으며 시적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또한 시일 터이기에 시적이란 말 앞에 지극히̓̓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왜 이처럼 감상자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시인의 시가 지닌 기법상의 특징 때문이다.『도덕경』의 “사람들은 꽃항아리를 만들기 위해 진흙을 굽는다. 그러나 실제로 쓰이는 부분은 꽃항아리 속 비어 있는 공간이다.”라는 노자의 말을 상기한다. 바꾸어 말하면 꽃과 항아리가 조화를 이룬 꽃항아리의 아름다운 어울림은 항아리 속 비어 있는 공간의 사용에 있다. 시인의 시 또한 이와 같은 비어 있는 공간을 통하여 시를 우려낸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도 시를 가져온 상상력도 이 자리를 통과하여 발현된다. 최근에 연작시리즈로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시편들,「투명에 대하여」도 이의 변주이다. 이 공간을 필자는 시적이란 말로 읽는다. 대체적으로 시의 외형은 형식을 존중한다. 동일한 대상이라도 대상이 지닌 수많은 형식 가운데 시인만의 친화적 관점으로 드러내는 서정의 형태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처럼 대상이 감상자의 시각적 유기성에 직면해 있다면 시적이란 말은 더 구속력을 가진다. 무엇보다도 절제된 감정의 간결한 묘사가 선험적으로 읽히고 있는 점이다.   

 

  현대시의 다양성에 비추어 산문 형태의 시들이 많아진 근자에 짧은 형식의 시를 대하면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진다. 시의 말이 감춘 부분을 헤아려보게 된다. 특히 한 호흡으로 읽히는 시는 더욱 그렇다. 천 마디의 말이라도 다 필요한 말이 있고 한마디 말이라도 필요치 않은 말이 있을 테지만 적어도 시가 지닌 매력 가운데 하나가 말의 간결성에 있을 것인데 비사실적인 것조차도 장황하게 문장을 나열함으로써 이미지를 흐려놓는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적 욕구가 이루어내는 경우라면 작위적이며 말의 낭비일 것이다. 시인의 시는 이와 같은 서술적 형태에서 동떨어져 있다. 짧은 말로 시의 개념을 충족시켜주는 엄선된 언어의 조율에 있다. 우선 분명한 언어구조를 통하여 문장의 공간을 자족하게 한다. 뜻이 분명히 선 말이 복잡하지 않는 것처럼 간결한 문장이 구체적으로 전달되는 까닭에 시인의 시편들이 대체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외적 오브제들과 교감해서 이루어놓은 압축된 문장은 시적 음미를 강화시켜주는데. 무엇보다도 시의 문장이 가시적일 때 수반되는 서정의 일체감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독자는 미처 도달하지 못한 감춰진 언어를 평면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서정시의 힘이란 대상이 표면을 뚫고나와 화자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 같은 반추의 형식으로 독자와 감정을 공유하는 게 특장인데 시인의 시는 그 같은 동력을 회화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사물이나 자연에서 가져온 가공하지 않은 것을 직관을 드러냄으로서 외관이 숨겨놓은 대상을 투영하듯 만나게 하는 것이다. 순수시가 대체적으로 언어 기능에 순응하여 다듬어진 정서를 전달하는 경향에 반하여 시인의 자율성은 시 이전의 시적이란 말과 상통하듯 이미지즘의 형태로 분명하게 읽히는 특이성이 그것이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투철한 자기인식을 통과해낸 텍스트의 경우라 할 것이다.

 

 

눈이 내린다

나무야

 

모난 짱돌같은

성깔있는 나무야

 

미련없이 벗어던진

누더기 입성들

 

눈이 내린다

나무야

 

내 맨몸

자존自尊의 투명 위에

 

겨울은 가만히

희고도 부드러운 손을 얻는다.     

                   

-「투명에 대하여 15」전문̒

 

 

  “존재하는 것은 지각知覺되는 것이다”라는 철학자 버클리의 말을 빌리면 대상은 바라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시의 기능이 새로운 존재의 발견에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여기서 새로운 발견이란 낡은 것과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라 일상 속에 존재하는 것인데 경험으로부터 주목받는다거나 실감하지 못하는 것을 찾아내서 시적 기능에 부합시켜 자기만의 사물을 본다는 뜻이다. 습관은 그런 것을 무력화시킨다. 그럴 때 하나의 대상에 대해 새로운 지각을 드러내는 언어행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허영자 시인의 시가 맑은 것도 완상의 취미 능숙한 것도 대상을 이성적인 눈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이 인용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겨울나무를 화자와 동일한 대상 위에서 호칭함으로써 실존을 고취하고 있는 점이다. 비록 “누더기 입성”일지라도 자존을 인정해주는 연대의식을 통해서 소외된 기능을 회복시키고 있다. 그런 까닭에 시어들은 투명하다. 일급수에 사는 물고기에 비유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환히 드러나는 물고기의 외관들, 지느러미부터 아가미며 비늘 꼬리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흐르는 물이 씻어놓은 바닥의 모래며 가느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수초들까지 현현하게 드러내는 감각들은 사실적이다. 이 맑음의 비등점에서 주체가 뚜렷한 사물의 힘이 드러난다. 여기서 보이는 투명은 세속적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고 구도자가 자기중심을 견지하는 태도와 같아 투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일관되게 맞서는 내면의 질서유지와 같다. 자아가 그렇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비우고 그 비운 공간을 통과하는 외연이 정겹다. 몸이 되고 마음이 되고, 내 몸 위에 내리는 눈은 나를 거쳐 가시적으로 드러난 나무의 명징한 모습 그대로이다. 혹독한 겨울에 맞서 “모난 짱돌 같은” 깐깐해진 나무를 보라, 투명해지지 않고 어떻게 눈을 맞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시인은 투명의 표면장력을 옹호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를 객관화하여 감상자적 변모를 보여주는 데는 몇 가지 모멘트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그 첫째가 결백에 대한 증명이다. 대상은 그처럼 시인에 닿아 있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특정한 사물과 사물이 관계하는 경험과 그것을 규정하는 관점으로 말미암아 그 실체가 명료해진다. 시인이 발견하고 있는 것은 나 이외의 어떤 것과도 결합할 수 없는 존재론적 자아다. 보들레르가 「창문」이란 시에서 반어적으로 읊고 있는 “열린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자는 닫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자가 발견하는 풍부한 사실들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는 시구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자아가 객체가 되지 않고서 또는 유일무이가 되지 않고서 주체를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말한 표면장력의 에너지가 그것이다. 내가 나를 일깨워 통과하는 모습은 지각적이다. “미련 없이 벗어던진 /누더기 입성들” 겨울을 겨울답게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 나무와 한속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안에 들끓던 욕망들은 이곳에 닿기 위한 겉치레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는 투명할 수 없는 온전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눈은 기탄없이 나무를 통해 겨울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으며 화자의 정신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니 명징한 시선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처럼 걸러내고 걸러낸 뒤 희고 부드러운 손을 지닌 수호자가 될 수 있기에 순결의 상징인 눈은 깨끗한 손만이 닿을 수 있고 고결한 정신만이 비유에 나설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내 더러워지는 형질의 대상이다. 그런 눈이 나무와 만나 겨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부처님은

기쁘셨겠다

가섭迦葉 같은 제자를 두어서

 

영혼과 영혼이 부딪는

한 순간의 섬광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

 

입으로 말하지 않고

귀로 듣지 않았지만

이미 다 말하고 이미 다 듣는

따뜻한 소통

그 투명한 교감

 

가섭迦葉은 진정

행복하였겠다

진신眞身 진언眞言의 스승

부처님이 계셔서.

 

-「투명에 대하여 14」전문   

 

 

  위 인용시의 작법은 보는 투명이 아니라 담아내는 투명이다. 부처님과 가섭 사이 “입으로 말하지 않고 귀로 듣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교감하는 “진신眞身 진언眞言의” 체현을 보여주고 있다. 염화미소는 석존이 한 송이 연꽃을 들고 영상회상의 법좌에 올라 가섭과 나눈 이심전심의 뜻을 두고 일컫는 말인데 모두에서도 기술했듯이 보이지 않는 것을 교감을 통해서 이뤄내는 투명이야말로 진정한 심미적 정경이다. 시인은 시 속에서 감상자적 형식으로 투명의 방식을 발화하고 있다. 부처님과 가섭이 마치 어제의 스승과 제자를 곁에서 지켜본 듯이 시간적 공간적 제약에서 온전히 탈피한 구성을 제시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새롭게 구현해내는 이와 같은 현사법적 은유는 감상의 객관화에 일조를 하고 있다.   

 

  문단 데뷔(1962년)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력에도 분절 없이 동양적 정치미情致美에 천착해온 시인의 시는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감상주의를 초월하여 존재와 대상 간의 사유를 주지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서정의 표층을 쌓아 왔다. “ 온갖 /물구나무를 섰던 혼魂들 /제자리에 깃든다 /꽃의 혼魂은 /꽃씨 속에 /나무 혼魂은 뿌리 속에 /가부좌 跏趺坐하여 앉는다 /우리들 /어둑한 골방에도 /불을 밝혀라 /간장 태워 /바자니던 발걸음 앞에 /묵도黙禱의 /거인 /밤이 열린다” 「가슴엔 듯 눈엔 듯(1966. 중앙문화사)」 시인의 초기 시는 박목월 선생의 시적 경향에 닿아 있는 듯해도 확연히 다른 주지적 서정에 경도되어 있음을 주목하게 한다. 인용되는 이미지가 주관적 사유로부터 독자적 시선으로 이끌어내는 절제된 문장이 인상적이다. 초기 시의 원형을 시력 반세기가 넘는 세월에도 고스란히 지켜온 데는 시인만의 부단한 성찰이 있겠으나 그보다도 내면을 치밀하게 가꾸어온 감상주의적 열정에 초점을 맞춘다. 시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표현의 충동을 현실화시킨다는 것도 아니며 어떤 예술적 규범에 부응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라는 공간에 경험을 대입하여 살아있는 관계를 맺고자 하는 행위이다. 어렵지 않아도 유사한 매락의 시는 시인의 시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시가 보여주는 효과 가운데 가장 긴요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인데도 자기만의 새로운 사유를 가지고  독자로부터 설득을 얻어내는 방식이다. 그것이 시의 참모습이다. 다시 시인의 근작시에 주목하고자 한다.   

 

 

실치를 보고 있으면

부끄러워진다

 

등뼈도 내장도

마알갛게 드러낸 그 투명 앞에

웬지 부끄러워진다

 

싸고 싸고 또 싸서

꼭꼭 숨긴 비밀이,

비밀의 등뼈와 내장이

낯 뜨거워진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실같이 가느다란

저 실치의 투명만도 못한 것인가

 

실치를 보고 있으면

자꾸 혼자 부끄러워진다    

                     

-「투명에 대하여 2」전문   

 

 

내 몸에서는

푸른

비취빛 내음이 난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고혹蠱惑의 살결

 

靑瓷청자여

 

내 앞에 서면

항시

투명해지는 나의 관능    

                         

-「투명에 대하여 10」전문   

 

 

  시인의 근작 시 두 편에서 두드러진 경향은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의지를 꺼내 보여 주는데 주저하지 않는 점이다. 이 같은 감정의 노출은 이미 내면의 조절을 걸쳐 드러난다. 「투명에 대하여 2」와 「투명에 대하여 10」을 견주어 볼 때 어딘가에 감정의 기복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윤리성이다. 곧 투명한 부분이 실치에서는 “부끄러움(그것도 낯 뜨거운)”인데 청자에서는 당당한 관능의 심미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투명에 대하여 2」에서는 실치 다음으로 나를 대입 시켜야 하는 순서에 직면해 있다. 어쩌면 어항 속 실치를 대신하여 시인이 들어가 유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투명한 공간에 드러낸 몸의 비밀들은 온전한 투명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본성이라면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실치”에 대한 시가 써져야만 하는 까닭은 시인 개인에게만은 국한될 일은 아닐 것이다. 기실 부끄러움을 지니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부끄러움은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가, “싸고 싸고 또 싸서 /꼭꼭 숨긴 비밀이 /비밀의 등뼈와 내장이 / 낯 뜨거워진다” 라는 시의 행보는 직설을 잠재우는 정점에 있다. 어떤 사물의 외관을 선택적으로 묘사된다 하더라도 그 속성을 본질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시의 힘이다. 실치는 부끄러움에 대해 선택된 불가피한 상관물인 것이다. 반면에 「투명에 대하여 10」에서는 “청자靑瓷”는 부끄러움조차 당당한 관능을 드러내놓고 있다. 문학(시)이 취해야 할 것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뛰어넘어 대상이 규정하는 구체적인 면을 보여주는 초월적 역할이다. 그것은 또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에게는 누구보다도 객관적 정서를 조절하는 지혜가 요구되는데 경험이 그 첫 번째에 놓여 있다. 

 

차랑차랑한 햇빛 속에

수녀님 한 분 지나가신다

하얀 머리수건 쓰시고

 

그 뒤를 이어

비구니스님 한 분 지나가신다

파르란 까까머리를 하시고

 

아아 참으로 멀리 계신

하느님도 부처님도

문득 내 곁에 계시는 것 같구나

 

투명한 가을 날.          

           

-「투명에 대하여 7」 전문

 

 

  가을 햇빛이 매우 좋아서 두 팔을 올려 안아보고 싶은 하늘이 이쯤이나 될까, 이 인용시 또한 심경을 꾸밈없이 드러내는데 주저 없다. 수녀님도 비구니스님도 “차랑차랑한 햇빛 속”을 외면할 수 없는 무구청정의 충만한 투명성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맑은 시선視線은 대상에 대한 관용이다. 관점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마련해놓은 공간이 자족하다. 시인을 정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마 꿈을 가장 많이 꾸는 사람일 것이다. 꿈이 꿈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르짖는 동안 꿈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 시에서도 시의 힘점은 투명을 통해 대상과 자아를 일원화시켜주는 수평적 작법에 있다. 화자와 사물의 간격을 이처럼 원만히 드러냄으로써 은유의 미학까지 공유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지각의 원리를 감정이입의 방식으로 차용하고 있다. 그것은 화가가 정물을 그리기 위해 과일을 바구니에 담아 식탁에 올려 캠퍼스 작업을 위한 연출을 해도 과일은 물관이 통과하는 나무에서 가져온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처럼 투명에 대한 온전한 자각을 일깨운다. 허영자 시인의 시를 살펴보는 동안 눈에 비친 사물과 사물의 주변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과장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그렇다고 은폐하거나 감추지 않으며 대상에 대해 애착하는 동안 수시로 깨어나는 존재의 기척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시의 질서가 시인을 에워싸고 있다는 생각이다. 시를 관찰하는 동안 이 불가피한 카테고리를 떠안게 되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변함없이 직관을 통해서 극기를 변주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땅에 반듯이 누워서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느라고 너무나도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렇게 해서 바라보았던 저 청명한 하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내가 그 순간들에 이르려고 마음을 먹었지!”      -장 그르니예-

 


* 『시와 표현 』2015. 2월호



                              이만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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