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덕의 詩 文學
비의 무늬를 보다 외4편 본문
비의 무늬를 보다
이만섭
수묵의 다섯 빛깔 가운데
맨 마지막에 번지는 농묵 같은,
잎새들 뒤란에 그늘을 짓고
스미고 스며
불빛 창에 귀를 여는 도화나무
봄날 어느 한때, 흙담 곁으로
자드락자드락 오선지의 선율을 밟고 와
나직이 귀엣말로 노래했는데
또다시 추억의 음표를 달고
잎새마다 그리움의 지문을 찍으며
젖은 불빛 사이로 발그레 드리운
투명한 비의 무늬를 본다
꽃이 진 자리에서
이만섭
바람이 꽃잎들을 쓸어내고 있다
더는 아픔일 수 없다고
후후- 함부로 불며
열망의 잔해들을 흩트리고 있다
이 애상에 젖은 영혼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잠시라도 보듬어주고 싶어
등 굽혀 한 움큼 움켜쥐니
누군가 등 뒤에서 부른다
그대는 언제까지 오류를 범할 것인가,
꽃나무 아래 저녁 빛이 허전하다
내부에 관하여 / 이만섭
어딘가 겹겹이 갇힌 듯 함구하며
똬리처럼 결속이 되어
스스로 들어있는 안이 실팍하다
고요에 든 무덤처럼
비록 어둡고 미혹한 곳이라 해도
묵시적일 때 순명을 기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허한 것도 그곳에 들면 실하다
누군가 그곳을 보았다면
증명 이상의 것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더더욱 보지 않고 들은풍월이라면
그것은 단지 풍문일 것이다
가령, 사랑이 그렇다니
이별이 어떻다니
하는, 그릇된 독해는
그곳으로 바람을 실어 나르는 짓이다
거울과 같이 보일지라도
그곳은 내내 감춰진 곳이기 때문이다
여백(餘白) /이만섭
기다란 그림자를 아파트 담벼락에 기댄
담장 밖 푸라타너스 가로수
정원사 김씨가 부리나케 쫓아와
멈칫 나뭇가지를 올려다본다
나무는 점차 담벼락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파랗게 물든 담벼락
하얗게 질린 김씨가 나무 뒤에 숨는다
남새밭에서
이만섭
무성한 숲을 베껴놓은 듯
이슬단장하고 빽빽이 모인 남새들 사이에
상추잎이 유난히 파랗다
저것을 뜯어 여름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와 점상 할 때
나도 아버지처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씁쓸한 입맛 다셔가며
부릅뜬 눈으로 고갤 끄덕거렸다
채마를 가꾸시듯
나를 가르신 아버지 앞에서
눈을 부릅뜨는 짓은 불효라던데
파랗게 부릅뜬 눈으로
상추잎들이 나를 반긴다
저 미혹한 것들을 쓰다듬다가 중얼거린다
아버지, 당신도 이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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