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덕의 詩 文學

비의 무늬를 보다 외4편 본문

※{이만섭시인서재}

비의 무늬를 보다 외4편

이양덕 2009. 5. 17. 19:44

 

 

 

비의 무늬를 보다

 

이만섭

 

 

  

수묵의 다섯 빛깔 가운데

맨 마지막에 번지는 농묵 같은, 

 

잎새들 뒤란에 그늘을 짓고

스미고 스며

불빛 창에 귀를 여는 도화나무

 

봄날 어느 한때, 흙담 곁으로

자드락자드락 오선지의 선율을 밟고 와

나직이 귀엣말로 노래했는데

 

또다시 추억의 음표를 달고 

잎새마다 그리움의 지문을 찍으며

젖은 불빛 사이로 발그레 드리운

투명한 비의 무늬를 본다

 

 

 

 

 

꽃이 진 자리에서

   

이만섭

 

 

 

바람이 꽃잎들을 쓸어내고 있다

 

더는 아픔일 수 없다고

 

후후- 함부로 불며

 

열망의 잔해들을 흩트리고 있다

 

이 애상에 젖은 영혼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잠시라도 보듬어주고 싶어

 

등 굽혀 한 움큼 움켜쥐니 

 

누군가 등 뒤에서 부른다 

 

그대는 언제까지 오류를 범할 것인가, 

 

꽃나무 아래 저녁 빛이 허전하다

 

 

 

 

 

 

내부에 관하여 / 이만섭

 

 

 

어딘가 겹겹이 갇힌 듯 함구하며

똬리처럼 결속이 되어
스스로 들어있는 안이 실팍하다

고요에 든 무덤처럼 

비록  어둡고 미혹한 곳이라 해도

묵시적일 때 순명을 기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허한 것도 그곳에 들면 실하다

누군가 그곳을 보았다면
증명 이상의 것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더더욱 보지 않고 들은풍월이라면

그것은 단지 풍문일 것이다
가령, 사랑이 그렇다니
이별이 어떻다니
하는, 그릇된 독해는 

그곳으로 바람을 실어 나르는 짓이다

거울과 같이 보일지라도
그곳은 내내 감춰진 곳이기 때문이다

 

 

 

   

 

 

 

여백(餘白) /이만섭

 

 


기다란 그림자를 아파트 담벼락에 기댄


담장 밖 푸라타너스 가로수


정원사 김씨가 부리나케 쫓아와


멈칫 나뭇가지를 올려다본다


나무는 점차 담벼락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파랗게 물든 담벼락


하얗게 질린 김씨가 나무 뒤에 숨는다

 

 

 

 

 

 

 

남새밭에서

 

이만섭

 


무성한 숲을 베껴놓은 듯
이슬단장하고 빽빽이 모인 남새들 사이에
상추잎이 유난히 파랗다

 

저것을 뜯어 여름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와 점상 할 때
나도 아버지처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씁쓸한 입맛 다셔가며

부릅뜬 눈으로 고갤 끄덕거렸다

 

채마를 가꾸시듯
나를 가르신 아버지 앞에서
눈을 부릅뜨는 짓은 불효라던데
파랗게 부릅뜬 눈으로
상추잎들이 나를 반긴다

 

저 미혹한 것들을 쓰다듬다가 중얼거린다

 

아버지, 당신도 이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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