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덕의 詩 文學

겨울밤 - 이만섭 본문

※{이만섭시인서재}

겨울밤 - 이만섭

이양덕 2011. 12. 24. 12:59

겨울밤  /이만섭

 

 

 

 

   어머니가 철늦은 메주를 쑤신다 가마솥에 콩을 안치고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니 늦은 게 되려 일거양득이다

 

   그러나, 볕 좋은 날 거둬들인 콩인데 가실 내내 헛청에 두었더니 서생원이 들락날락 빼먹고 그 구멍에서 나와 데굴데굴 구르던 콩이 도리깨로 얻어맞은 마당 가운데까지 쫓아 나와도 누구 하나 건사하는 이 없고 농한기가 따로 있을 터는 아니지만, 어지간하고 무던하다고 세월 타령을 하다가 입동을 넘기고 소설 지나 달아매게 생긴 것이다

 

   장작이 타오르자 추위는 아궁이 옆에 자리를 틀고 곁불을 쬐다가 시름시름 졸고 있다 콩이 삶아지고 솥뚜껑이 열리자 와락- 하고 달려드는 뜨거운 김에 화들짝 놀라 어둠 뒤에 숨는다 콩은 이제부터 발효의 시간이다 끈끈하게 뭉쳐 깊고 푸른 길을 간다

 

   모든 생이 한 번은 그래야 하듯이 침잠 속에서도 뒤척뒤척 꿈꾸며, 지난 가을 뒷등에다가 콩단을 지어놓았을 때 산비둘기 날아와 콩 꼬투리를 쪼아대던 추억을 지금은 어디서 빼먹고 있을까, 뒤척거리던 시간에 묻어가자니 어머니는 시집 와서 끌고 온 이야기가 섪다 명주실꾸리 다 풀어내도 닿지 않는 용소의 깊이로 지나온 생의 길이가 놓이는 것이다 아뿔싸! 겨울밤의 이야기들은 입 밖에 꺼내지도 말아야 하겠구나,

 

   아침이 오면 가마솥에도 볕이 들고 아랫목을 덥히던 아궁이의 장작불도 깡그리 흰 재만 남아서 그 떠나온 길 헤아리기도 아득하겠거니 다만 지금은 메주를 쑤는 길고 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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