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덕의 詩 文學

기린을 꿈꿀 때 ㅡ 이만섭 본문

※{이만섭시인서재}

기린을 꿈꿀 때 ㅡ 이만섭

이양덕 2012. 10. 10. 15:18

기린을 꿈꿀 때

 

 

이만섭

 

 

 

기린을 우러른다

새털구름을 차양으로 내린 먼 눈빛의,

발굽 아래 하늘은 관이 게양한 푸른 깃발을 드날리며

초원을 운동회 날처럼 뜀박질로 쫓아가면

인각麟角으로 아카시아나무를 에운 피그미족 마을이 있는데

그곳의 족장은 기린이었다.

 

모다기모다기 린 아래 자라는 초목들,

어둠이 내리면 별들이 뛰쳐나와 풀등을 달고 반디처럼 환하게 허공을 비춘다.

그 풍광을 만화경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면

바람만이 드나드는 간짓대 같은 긴 모가지인들 외로움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기린을 기다리는 나의 초원은

방죽이 매워진 좁다란 마당이었다

가시나무 울타리 안쪽에 은화식물 드문드문 더디 자라는데

어머니가 종지를 들고 장독대에서 간장을 뜨신다.

그 음식으로 지어내는 밥맛을 유년은 날마다 놓치고

빨랫줄에 앉은 참새처럼 짹짹거린다.

 

할 수 없이 기린의 등 같은 높다란 당산나무에 올라 설움을 닦아내는 것인데

초원처럼 푸른 이파리들 틈에 끼어 광합성에 들면

그런 저녁은 나무에서 떨어져 발목이 부러지는 꿈을 꾸고

어머니는 길몽이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저녁을 다시 찾은 듯

어느 어스름 녘에 만난 기린의 시간,

사바나의 한 귀에서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우아하게 모가지를 흔들며 줄기처럼 꼬아 싸움의 기술을 일러주는데

여전히 길게 뻗어 올리는 향기로운 관은

외유내강의 혀를 단련시키기 위해

아카시아나무를 찾아가는 놀이였던 것이다.

 

기린은 초원 아득히 떠났어도

문득문득 덮치는 성장통으로 방패연이 걸린 가시나무를 향해 뛰어가면

푸른 하늘이 호수 같은 물 가득 채워놓고

기린의 관이 닿기 전에 나의 손길이 찰랑 적셔주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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